주간말씀묵상(1451호)
나의 기도 제목
베데스다 연못 앞, 예수님과 38년 된 병자와의 만남은 참 특이했습니다. 왜냐하면 38년 된 병자는 마치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눈치이고 예수님도 그가 고쳐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병을 고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병이 나은 사람은 병이 낫고도 감사의 표현을 전혀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날이 안식일이기에 왜 자리를 들고 가냐는 사람들의 말에 놀라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해서 들고 가는 거라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낫기를 원하냐고 질문하실 때 “낫고싶습니다”라고 대답하지 않고 “연못 물이 움직일 때 누군가가 자기를 연못에 넣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온통 물이 흔들리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자기에게 낫기를 원하냐고 물으시는, 자신을 고쳐 주실 수 있는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에 참 약합니다. 그래서 좋은 집에 살아야 하며 비싼 가방을 들고 다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행복하고 자존감도 높아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원하는 기도가 튀어나옵니다. 문제는 정작 그 기도에 응답하실 하나님, 그리고 그 기도 끝에 부르는 예수님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가 어떤 분이신지 오랫동안 듣고 배워왔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나의 기도 제목은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눈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로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내가 간절히 바라는 일을 이루기 위한 도우미로 여길 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치시고 회복시켜 주셔도 감사하고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의 안녕과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모르는 척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병을 고쳐 달라고 하지도 않는 그 병자를 고쳐 주셨을까요? 왜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자기 욕심이 이루어지기만 바라는 우리에게 찾아와 만나 주시는 걸까요?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한 채 욕심 가운데 있는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먼저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친히 우리를 고치고 회복시키시며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기도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혹시 세상이 주는 좋은 것들을 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의 기도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삶 가운데 임재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오직 그를 위한 삶을 살기 원하는 것이 되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의 막혔던 눈이 떠지고 닫혔던 입이 열리고 죽었던 다리로 걷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