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희 장로의 회심과 신유사역 ⑥

2025-05-21     한국성결신문

주의 일을 하겠다고 자원하는 사람도 있지만, 주께서 친히 지명하여 부르셨는데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주의 일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딴짓으로 허송세월하는 사람도 있고, 부르심에 저항하다가 끝내 항복하여 끌려나왔지만, 진실하고 충성되게 부르심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도 있다. 박동희 장로는 후자의 좋은 예이다.  

신유의 기적이 지속적으로 일어났지만, 박동희 집사는 세상의 미련을 쉽게 놓지 못했다. 신유 사역으로 섭생(攝生)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체면과 자존심을 구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30대 후반이었지만 그를 받아주는 직장은 없었고, 완전히 무위도식(無爲徒食)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럴수록 빚도 덩달아 늘어갔다.

그 와중에 한 장로가 광산업을 같이 하자고 연락이 왔다. 하나님이 순적히 열어주시는 길처럼 보였다. 그래서 지인들에게 많은 돈을 빌려 광주로 내려갔다. 1981년 5·18민주화운동 직후였다. 광주에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대한수도원에 가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3일간 금식기도를 드렸다.

화순에서 광산업을 시작했는데, 동업하던 장로가 더는 투자할 수 없다며 자금줄을 끊어버렸다. 처음에는 너무 황당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박동희 집사는 물고기 뱃속에서 철저히 회개했던 요나처럼 자신에게 맡겨준 사명을 감당하기로 결심했다.

신유 사역 외에는 모든 길이 막혀 버린 상황에서, 박동희 부부는 무등산 중턱에 있는 헬몬산기도원을 찾았다. “기도하다가 살면 살고 죽으면 죽자!” 하는 각오로 금식하러 간 것이다. 부인은 7일을 작정했고, 박 집사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데까지 하자”는 생각이었다. 금식 3일을 마쳤을 때, “국가보조금이 나왔으니 찾아가라”는 연락이 와서 보조금을 찾아다가 일부 빚 잔치를 했다. 이후 아내 우춘자 집사는 결국 광신대 진학을 결정했다.

하루는 광신대에 가서 입학원서를 받고 오는데, 도중에 광주 주월교회에서 시무하던 방철호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전에 안 믿는 선배의 소개로 방 목사를 알고 있었다. 방 목사가 “차 한 잔 하자!”고 했다. 그때 방 목사가 이렇게 말했다. “주월교회가 변두리에 있어서 들어오기도 힘들고 교통도 불편하니, 광주시내에 있는 제일성결교회로 가세요.” 그 말에 부부는 큰 감명을 받았다. 자기 교회로 오라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일텐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부부는 그 다음 주에 주월교회를 찾아갔고, 참 열악한 상태였지만 주월교회 식구가 되었다. 부부는 현재까지도 광주주월교회에 교적을 두고 있다.

방철호 목사와의 만남은 이후 부부의 신유 사역에 새로운 지평을 만들어주었다. 앞장서서 부부를 도와주었고, 신유 사역과 성령운동을 변호해 주었다. 방철호 목사는 5·18민주운동의 산 증인으로, 광주지역의 기독교 연합운동과 각종 사회운동에 헌신하고 있던 유명 인사였다. 그런 인사가 이들 부부의 사역을 적극 옹호하고 홍보해 주었던 것이다.

훗날 박 장로가 유명 목회자들이 거의 독점하던 광주광역시 복음화대성회 강사로 두 차례나 설 수 있었던 것도 방철호 목사의 천거와 적극적인 지원에 힘 입은 바가 컸다.

이때를 전후하여, 박동희 장로의 본격적인 신유 사역이 시작되었다. 곡성군 옥과면에 있는 광암장로교회가 최초의 집회였다(1982. 1). 집사라는 이유로 편견과 차별도 있었고, 부흥회를 어떻게 인도할 줄 모르는 어설픈 모습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크게 나타났다. 중풍병자가 고침 받고 뛰어다니는 역사가 나타났고, 잘 걷지도 못하던 위암환자가 기도 받고 뛰어다는 역사도 나타났다. 손가락에 걸린 암으로 손목까지 절단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은 환자가 기도 받은 후 손에서 암 덩어리가 쑥 빠져 나오는 역사도 있었다.

이 집회를 계기로, 광암교회는 은혜를 받은 성도들의 헌신으로 교회당도 증축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