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1449호)
‘나도 암이랍니다’
어느 날, 친구를 따라 병원에 갔다가 검진을 받았다. 이상 소견이 보여 정밀검사를 하였더니 ‘전립선암 3기’로 확진되었다. 다행히 전이가 되지 않았고, 항암치료를 받지 않아도 되며 조기에 수술을 하면 된다는 상급병원 의사의 말에 안심은 하지만, ‘암’이라는 병명은 나로 하여금 인생의 남은 시간을 생각하게 한다.
검사 결과 조기발견을 하였고, 전이는 되지 않았기에 심각한 증세는 없지만, 왠지 ‘암’이라는 단어가 신경이 쓰인다. 그리고 주변에 여러 가지의 ‘암’으로 확진을 받고, 수술을 하거나 치료를 받았던 분들을 생각하며, 그분들의 심정도 헤아려 보며 하루의 소중함, 시간의 소중함.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생각하며 통계적인 기대수명과 의학적인 잔존수명을 헤아리며 여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언젠가는 떠나야할 인생, 지난날 어리석었던 삶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지만, 곁에 있는 친구처럼 나를 철학자로 만든다. 잔존수명을 생각하며 가족과 이웃을 더 사랑하며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그 동안도 주님의 은혜로 복음 안에서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생각을 가다듬고 주님 앞에 설 때에 ‘상 받을 자’로 살며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시대이지만, 복음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지난 3월, 19년 전에 처음 방문하였던 가난한 나라 방글라데시, 이후 수차례 방문하며 교단 최초로 현지인에게 목사 안수를 주고, 15년 전에는 선교센터도 지어주고, 빈민구제사역을 하였던 그곳에 자비량으로 가서 빈곤한 삶을 살며 희망이 없이 살아가는 농어촌 사람들을 만나 위로하고 격려하고 다녀왔다. 이전보다 더 보람이 있는 일정과 여정이었다.
종교학자들은 ‘종교가 크기와 성장에 휘둘리는 순간 본질을 잃어버리기 쉽다.’고 하였다. 소명을 받고 사명감을 갖고 목회를 하였던 ‘나는 진정 영혼을 사랑했는가?’ 아니면 신앙공동체의 운영자로서 ‘크기와 성장’의 올무에 갇혀 지내지는 않았는지를 자문해 본다.
사역이라는 이름으로 ‘영혼 사랑’보다는 ‘목표지향적인 일’을 위하여 성도들에게 지나치게 부담을 주는 사역을 하지는 않았는지 돌이켜본다. 목회는 목양이라는 다짐의 실행보다는 비본질인 사역에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는지도 자성해 본다.
어느 칼럼에서 읽은 글이 마음에 와 닿았다. 기독교와 구원관이 다르고, 종교관이 다를 수는 있으나 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항상 사목들에게 ‘상대방과 손을 맞잡고 눈을 마주치라’고 하였다. 달라이라마는 ‘나의 종교는 친절’이라고 하였고, 고 설악 무산 스님은 ‘종교는 사람들 비위를 맞추는 것’이라 했다고 한다.
기독교와 타종교는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공통점은 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인생길에서 끝이 보이는 순간이 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잃어버리기 쉬운 본질, 사랑을 지키며, 끝까지 사랑의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달려야 하겠다. 복음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 겸손하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오늘 나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걸음을 내 딛는다.
모든 이들이 평생 동안 한 가지 지킬 것과 버릴 것을 생각하며, 그동안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가를 돌이켜 본다. 나는 겸손하게 이웃을 사랑했는가?
‘겸손은 어렵다.’ 그러나 성경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말씀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인생의 남은 날을 겸손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