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에 눈먼 신앙인
신앙인이 비신앙인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보이지 않는 것의 추앙”이라고 말하고 싶다. 신앙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면서 살아가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봄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靈)이시다 (요 4:24). 하나님이 믿음의 대상이다.
보이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누구든지 보이는 것은 인정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 ‘미친 사람’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그렇지만 믿음의 대상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추앙하는 능력이다 (히11:1). 그런데 겉모습만 신앙인이다. 믿는다고 말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믿는다고 하지만, 보지 못하면 믿을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무늬만 신앙인이라고 나무랄 수만은 없다. 신앙인이 사는 이 세상이 눈으로 목격하는 것만 인정하고 결정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전 세계의 질서를 바꾸었다. 그중에 하나는 비대면의 증가다. 비대면의 증가로 비대면 예배가 일상이 되었다. 회의도 비대면 회의로 전환했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코로나 19로 인하여 증명되었다. ‘줌,’ ‘카카오 영상통화,’ ‘구글 영상’ 등의 기술발달로 인해 만나지 않아도 만남이 되게 했고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비대면 회의가 가능하여서 만나지 않고도 만난 듯하게 했다. 영상통화가 가능해져서 직접 얼굴을 보지 않았지만, 본 듯하게 만들었다.
첨단과학의 초고속 발전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익숙하다. ‘가상세계,’ ‘가상공간,’ ‘가상화폐,’ ‘가상현실’. 가상(假像)은 실물처럼 보이는 거짓 형상을 뜻한다. 가상현실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 실체가 보이는 실체가 되는 것이다.
‘가상현실’과 ‘가상화폐’는 실물은 아닌데 시각적으로 보이게 한 거짓 형상(?)이다. 그래서 눈이 보기 때문에 믿는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허상을 보는 것이었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 가상현실과 가상자산이 허상이 아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가상현실과 가상자산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보이지 않는 영역을 보이는 영역에 속박시켰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에 보이는 것에 신앙도 속박되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추앙해야 하는 신앙이 보이는 것에 속박되었다. 보이는 것에 의해서 신앙이 결정된다.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보이지 않는 것을 추앙하는 신앙인을 찾기가 힘들다. 혼란과 갈등이 깊은 이 시대에는 많이 아는 신앙인보다는 겸손한 신앙인이 필요하다. 겸손한 자는 화해와 평화의 거름이 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추앙하는 신앙인은 겸손할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은 인간의 시야와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는 체를 해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존재이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는 겸손할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사람들을 모른다고 고백하고 겸손하게 한다.
신앙인이 보이는 것에 속박되면 신앙인이 아니다. 신앙인의 태도를 포기한 것이다. 보이는 것에 속박되면 보이는 것으로 사람과 세상을 판단하려는 습성이 생긴다. 극좌와 극우로 분열하는 사회에 기독교가 평화를 가져오고 공존하게 하려면 신앙인의 자세를 되찾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추앙하는 자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추앙하면 겸손해지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추앙하면 보이는 현실에 의존하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