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신사참배, 성결교회는 어땠나
서울신대 영익기념강좌 “타교단들처럼 소극적이었지만 교단 해산조치 등 저항도 분명 친일-반일 획일적 단정 피해야”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정병식 교수)는 지난 4월 8일 서울신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제29회 영익기념강좌를 개최했다. ‘일제강점기 한국성결교회 신사참배’를 주제로 열린 이날 강좌에서는 허명섭 박사(시흥제일교회)와 박문수 박사(서울신대)가 강연했다.
‘한국성결교회와 신사참배 문제’를 주제로 강연한 허명섭 박사는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성결교회의 신사참배는 역사적 사실”이라면서도 “교단이 해산될 만큼 재림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저항했던 부분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 박사는 당시 최고 의사결정권자였던 이명직 목사가 “일제 당국의 신사는 국가의례”라고 주장한 점과 일제의 의해 강제된 교회연합운동에 편입된 부분을 들어 한국성결교회도 다른 교단처럼 신사참배에 동참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허 박사에 따르면 이명직 목사는 1937년 10월 신사참배에 관한 한 장로교 신자의 질문에 “서양인은 동상 앞에서 탈모하여 경의를 표한다고 하니 나는 신사참배는 동일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즉 신사는 종교가 아니며 국가예식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신사참배도 문제가 될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또 허 박사는 “한국성결교회가 조선기독교연합회나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참여한 것은 이들 단체의 성격을 고려할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지 못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고 부연했다.
허 박사는 신사참배에 대해 총회 차원의 결의가 없었다는 일부 목회자와 학자들의 지적에 대해서는 “당시 한국성결교회는 총회가 아닌 이사회로 운영되었으며 1941년 일어난 금화성결교회 불경사건과 1943년 광주지방법원 소송기록에서 ‘본래 성결교인들은 신사참배를 극렬하게 반대했지만 상부의 지시에 따라 기존의 태도를 바꾸었다’는 진술이 나온다”며 “다만 ‘강제적으로 신사참배를 장려하고 있으므로 할 수 없이 하고 있지만 우리는 신사에 모시고 있는 신에게 참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에게 참배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참배한다’는 증언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허 박사는 한국성결교회의 해산 원인은 재림 신앙 때문이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그는 “한국성결교회의 해산 원인으로 신사참배 문제를 지적하는 입장도 있지만 오히려 성결교회의 수난과 해산에는 재림 신앙이 자리잡고 있다”며 “성서가 증언하는 재림 신앙은 일제 말 격랑이 사납게 몰아치는 중에도 결코 놓을 수 없는 성결교회의 생명처럼 여긴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어진 강연에서는 박문수 박사가 한국성결교회의 신사참배에 대한 참회고백을 제안했다.
박 박사는 “총회의 결의나 특정 집단의 결정, 소수 지도자들의 잘못으로 치부하는 것보다 우리 모두의 우상숭배 죄로 여기는 것이 성서의 교훈이 아니겠는가?”라고 되묻고 “한국성결교회는 일제에 타협적인 모습과 저항하는 모습을 모두 보여줬는데 자랑스러운 역사는 겸손과 지혜로 알리고, 부끄러운 역사에 대해서는 언제까지라도 회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발제 후에는 박종현 박사(연세대 국학연구원)가 논찬, 박명수 박사(서울신대 명예교수)가 총평했다.
박종현 박사는 “신사참배 거부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신앙 규범과 국가가 강제하는 의례의 형식적 갈등이었다”며 “정치 권력이 주도하는 체제와 반체제라는 구도 속에서 제도적 교회가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방안은 식민지 조선에서는 불가능했지만 최후까지 저항했던 이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 역사를 지탱하는 원초적 힘은 개인의 신앙”이라고 논평했다.
박명수 박사는 “성결교회의 신사참배는 강제에 의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재림사상은 일본의 국체명징과 대립되었고 이것은 성결교단 해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며 “신사참배와 재림신앙만으로 한국성결교회의 역사를 친일과 반일로 보는 단선적인 해석은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강의 전 열린 예배는 정병식 박사의 사회로 서울신대 부총장 윤철원 교수의 기도, 총회 역사편찬위원장 성찬용 목사, 경기중앙지방회장 목일균 목사의 축사 후 이한복 목사(정선교회)의 소개 등으로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