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1441)아이들 마음에 ‘긍휼의 씨앗’을
불쌍히 여김을 넘어 고통을 공감하는 것 교회학교에서 두고두고 가르쳐야 한다
현대 사회는 매우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이렇게 다변화, 다원화, 복잡화 되어가는 사회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학교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경기도교육청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학교 단독으로 미래를 위한 교육과정 수행이 버겁다는 현실을 인식하면서 지역사회와 학교 교육의 접속을 시작하였다. 대표적으로, 경기공유학교는 지역사회 협력을 토대로 학생 개개인의 특성에 맞는 맞춤형 교육과 다양한 학습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학교 밖 학습터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종교 기관이라는 이유로 공유학교에 참여가 제한된다. 교회학교 교육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은혜를 입은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특별교육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현시대에 인성교육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학부모의 높은 교육열과 대학 입학을 위한 학력 경쟁에 몰두하여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바로 이점이 교회학교가 복음을 바탕으로 아이들의 인성을 내면화시키는 특화된 교육기관으로서의 기제가 된다. 신실한 믿음과 올곧은 인성을 가진 기독인이 사회 각계각층의 지도자가 된다면 정의로운 사회, 서로를 믿는 신뢰 사회가 구현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학교 교육 보완재로서 교회학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나? 예수님은 믿음의 자녀들이 지켜야 할 계명으로 첫째, 하나님 사랑(막 12:30)을, 둘째, 이웃사랑(막 12:31)을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0장(29-37)에는 이웃사랑의 비유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화가 나온다.
필자는 시골 교회 주일학교에서 이 장면을 배울 때, 제사장과 레위인은 나쁜 사람이고 사마리아 사람은 착한(좋은) 사람으로 단순하게 이해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서 사회과목을 가르칠 때에는 개인의 자유와 도덕의 의무를 법으로 강제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에 관하여 주제 토론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요즘 성경을 읽으면서 새로운 것을 새삼 깨닫는다. 강도 만난 사람과 일면식도 없는 사마리아인이 왜 아무 대가도 없이 그를 친절하게 치료해 주고 비용까지 부담했을까?
강도를 만나 폭행을 당하여 죽어가는 사람을 본 사마리아인은 불쌍히(동정, 연민; compassion, pity) 여기는 마음을 소유했기 때문에 그에게 선행을 베풀었다. 성경에는‘불쌍히 여겨’라는 한 어절의 표현으로 쓰여 있으나,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 중 긍휼하심(compassion), 자비하심(mercy)이라는 단어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고 계심을 표현한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엡 2:4), 긍휼히 여기시고(롬 9:18),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시 59:17),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시 86:15),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시 103:13).
아마도 사마리아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또는 긍휼히 여기는 그 심정으로 강도 만난 사람을 사랑했으리라.
근래에 학교 폭력, 교권 침해, 악성 민원 등으로 교육 3주체인 학생, 교사, 보호자 간의 분열과 갈등이 매스컴을 통해 심심치 않게 보도되고 있다. 40여 년 동안의 교직 수행 중에, ‘긍휼(矜恤)’이라는 단어를 학교에서 사용한 적이 없다. 사회 교과서에서 그 단어를 발견하지 못했고 그러한 이유로 인해 학생들에게 ‘긍휼’을 가르치지 않았다. 긍휼은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행동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학교 교육에서 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이 품었던 ‘불쌍히(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아이들의 내면에 자리할 수 있도록, 이를 강조하고 반복하여 가르치기를 갈망한다.
아이들의 내면에 ‘긍휼의 씨앗’이 자란다면 우리 사회에 갈등이나 분열, 미움이나 시기, 분노와 폭력, 멸시와 차별 등으로 상처받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않을까? 이 ‘긍휼의 씨앗’이 자라 협력과 배려, 존중, 봉사, 이해, 용서, 관용, 공감으로 일상생활에서 생명력을 발휘한다면 믿음의 선진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새벽마다 부르짖었던 그 기도가 응답받는 현실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