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도 ‘여호와 이레’

(창 22:1~14))

2024-12-24     양귀원 목사 (서울북지방·성북교회)

유대인들은 신년 축제의 첫날 이삭의 탄생 이야기인 창세기 21장을 읽는다고 합니다. ‘이삭’은 바랄 수 없는 중에 얻은 아들이죠.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은 ‘그가 웃다’입니다. 

신년 축제의 첫날에 이삭의 탄생 이야기를 읽는 것은 일년 내내 하나님께서 주시는 웃음과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아울러 하나님의 약속은 더디더라도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대로 새해를 맞이해도 현실은 언제나 꽃밭일 수는 없죠. 만사형통의 꿈은 언제나 좌절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신년 축제의 둘째 날 이삭의 결박과 희생 이야기인 창세기 22장을 읽는다고 합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상을 해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는 벌을 주시는 분으로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으로 쉽게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깊은 속을 다 알 수 없는 것이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거둘 수는 없었습니다. 고단한 삶 속에서 언제나 동행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만났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믿음 하나를 붙잡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돌파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시험의 끝자락에서 ‘여호와 이레’를 만났습니다.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아들을 내리치려는 아브라함을 급히 부르시죠.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을 아노라” 하시고는 아브라함의 눈에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을 보게 하시죠. 아브라함은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곳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신년 축제 둘째 날에 창세기 22장을 읽는다는 것이 너무나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삭의 탄생이 기쁨이라면 이삭의 희생제물 이야기는 슬픔과 고통입니다. 인생은 기쁨과 빛만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죠. 신앙생활은 늘 모든 게 잘될 거라며 ‘긍정적 사고방식’ 혹은 ‘적극적 사고방식’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고통과 절망의 자리, 낯선 현실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라고 이삭의 희생제물 이야기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결단을 요구하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가면, ‘여호와 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것이라!”라는 사실입니다. 

새해 한 해를 또 살다 보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관심하신 것처럼 생각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절망의 가장자리로 몰아가시는 것 같아 낙심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창세기 22장 이삭 이야기의 결말,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압도해 오고,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 하나만을 굳게 붙잡고, 돌파해 나가면,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준비해 놓으시는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새해에도 ‘여호와 이레!’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