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돈 목사의 회심과 성결 체험 ③
이병돈은 1955년 서울신학교(서울신대 전신)에 입학했다. 이명직 목사가 학장이었고, 교수진도 실력 있는 복음주의자들로 진용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이 학교생활은 크게 불만이 없었다. 새벽기도는 의무였고, 매주 두 차례 있는 채플시간은 박수를 치며 찬송을 부를 정도로 뜨겁고 은혜로웠다.
하루는 이명직 목사가 설교 중에 이렇게 권고했다. “말씀을 읽다가 울고, 말씀을 읽다가 웃고, 말씀을 읽다가 무릎을 치고, 말씀을 읽다가 춤을 춰라.” “이렇게 말씀에 붙들리기 전에는 목사가 될 생각을 하지 마라.” 교역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이다. 그런데 그 말씀의 맛을 알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제대로 그 말씀을 전할 수 있겠는가. 그 말씀의 맛을 알지 못하면 교역자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기숙사 안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학교부흥회가 열리면 많은 학생이 앞다투어 회개의 간증을 나누었고, 그 은혜의 불은 주변으로 옮겨 붙으며, 영적인 열기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평소에도 낮밤을 가리지 않고 교내 곳곳에서 기도하는 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영적으로 붙들릴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적응이 안 되는 학생은 자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곤 했다. 서울신학교의 교육은 철저한 경건훈련에 방점을 두고 었었다. 입학 동료 50명 중 17명만 졸업할 정도로 영성훈련이 강했다. 수업도 신학적인 학문보다 성경을 중심으로 공부하는 권별 강해가 대부분이었다. 덕분에 대다수의 학생들은 아침 점심 저녁 하루에 세번 기도하는 습관을 가질 수 있었다.
성령충만한 교역자는 서울신학교의 비전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중생의 체험과 함께 성결의 체험도 강조했다. 한번은 이병돈 학생이 깊은 죄의 쓴뿌리를 깨닫는 사건이 일어났다. 기숙사 방에서 친구들끼리 신학토론을 하다가 다툼이 벌어졌다. 화가 난 강신찬 학생이 갑자기 슬리퍼로 “너 잘났다”고 이병돈 학생을 치면서 소리쳤다. 이에 이병돈 학생도 반사적으로 의자를 들어 강신찬 학생에게 던지려고 했다. 친구들의 만류로 싸움은 끝났지만 감정은 풀리지 않았다. 이 일로 두 사람은 하나님께 크게 회개하게 되었고, 서로 “내가 잘못했다” 고 화해한 후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이병돈은 깊이 박힌 죄의 쓴뿌리로 영혼의 번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2학년 가을학기에 열린 신앙수련회에 참여했다. 둘째 날 새벽 이명직 목사가 성결에 대해 설교했다. “성결한 사람이 되고 성결한 생활을 가져야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고 복음이 막히지 않는다.” 그러면서 “행동의 죄, 마음의 죄, 양심의 죄, 성령을 거스른 죄”와 같은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성결한 사람이 되라고 계속 강조했다.
이병돈은 자신의 모습과 행위와 죄를 보게 되었고, 성령의 만지심으로 크게 통회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중고등학생 때도 여러 번 회개하는 통회가 있었지만, 이 날은 글자 그대로 통곡의 날이었다. 깨지고 또 깨지는 경험이었고, 회개의 내용과 깊이도 달랐다. 새벽 집회가 끝난 뒤에도 늦게까지 강단 앞에서 계속 울면서 기도하고 있는데, 이명직 목사가 “그만 울어도 돼. 하나님이 다 들으셨다”고 하며 지나갔다.
그런데도 이병돈은 계속 울면서 회개하고 있었다. 그때 환상 중에 흰 옷을 입은 예수께서 나타나 손을 펴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네 죄를 사했다. 내가 네 죄를 사했다. 내가 네 죄를 사했다.” 세 번의 확실한 음성이었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특별한 인치심이었다. 그때의 영적인 감동은 여생 동안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였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마냥 춤을 추고 싶었고 어디론가 한없이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기숙사로 돌아온 후에도 계속 찬송과 감사의 기도가 흘러나왔고, 그 은혜에 붙들려 반나절을 금식과 성경을 읽기로 구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