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주인공 없는 성탄절, 세상은 쾌락에만 관심
이사야 ‘임마누엘 예언’ 부른 주님 거역한 아하스의 죄악 지금도 구약 속 아하스 같아 교회가 성탄절 참뜻 알려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구원도 불가능했겠지만, 그 이전에 예수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탄생하지 않았다면, 십자가와 부활 사건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적 메시아의 육신적 탄생은 기독교의 독특하고 핵심적인 사건이자 교리이다.
그럼에도 예수의 탄생과 공생애 이전의 삶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신약의 사복음서 중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초반에만 예수의 탄생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구약에는 예수라는 구체적인 인격으로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를 직간접적으로 만난 신약의 저자들은 예수를 보고 구약의 메시아 예언들을 떠올렸고, 구약을 인용하여 예수가 약속된 그리스도임을 증거했다.
“구약에서 읽는 성탄”이라는 주제를 들었을 때 마태복음 1장 23절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이 본문은 이사야 7장 14절의 예언을 인용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여기서는 이 코너의 취지에 맞게, 이사야 7장 14절의 메시아 예언을 구약의 맥락에서 살펴보며, 성탄의 의미를 생각하고자 한다.
이사야 7장은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으로 인해 두려워 떠는 남유다의 왕과 백성들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사야는 자기 아들과 함께 가서, 남유다 왕인 아하스에게 여호와의 구원을 선포하고, 그 약속을 믿을 것을 촉구한다. 그리고 아하스에게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징조를 하나 구하라고 한다. 징조는 히브리어로 ‘오트(אות)’인데, 이는 기적적인 것과 평범한 것을 모두 포함하는 단어이다. 예를 들어,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라는 표현은 대유법(merism)을 통해 깊은 곳에서 높은 곳까지 그 사이에 있는 세상 전체를 포함하는 단어이다. 또한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스올이라는 단어로 표현된 “깊은 데”는 보통 망자들의 세계로서, 신적인 영역과 인간적인 영역을 모두 아우르는 표현이다.
다시 말해 구원 약속의 확실함을 보여주기 위해 자연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든 가능한 일이든 아하스가 구하는 어떤 것이라도 징조로 주시겠다는 엄청난 제안이다.
심지어 먼저 징조를 구하거나 일방적으로 징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네가 원하는 징조를 무엇이든지 구하라는 제안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은 구약 성경에서 흔치 않다. 이러한 드문 경우가 므낫세와 함께 남유다 역사상 가장 악한 왕 중 하나인 아하스에게 일어났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지만, 그만큼 다윗 왕조와 남유다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하스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다며, 이 제안을 거절한다. 일견 신실하고 정중해 보이는 아하스의 거절은 사실상 여호와를 거절한 것이다. 열왕기하 16장의 기록과 이사야 7장 18절의 암시를 고려할 때, 아하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우심보다는 당장의 위기를 해결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앗수르와의 동맹을 택함으로써, 여호와와의 동맹을 파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약속이 주어졌다. 사실 임마누엘 약속 이전부터 현재까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출애굽 후 광야의 성막부터 시작해서, 솔로몬의 성전은 모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실제로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이었다. 성막에 필요한 구체적인 자재들, 자세한 제사 안내, 그리고 특별한 냄새가 나는 향과 기름 등은 모두 거룩한 하나님이 이 땅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쾌적하게 거하시기 위한 장치들이었다. 여호와는 땅에 내려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성막과 성전에 항상 임재해 있었고, 때때로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내셨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성전에 상주한 것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참된 왕으로 이스라엘을 거룩한 나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실패했다. 여호와가 징조 구할 것을 제안하고, 아하스가 이를 거절하고, 여호와가 친히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약속을 주시는 것은 이스라엘의 불충과 여호와의 신실함을 극적으로 대비시켜, 여호와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 임마누엘의 약속은 그 이전의 하나님의 임재와 무엇이 다른가? 이제 그분은 임마누엘로, 인간 세상에 더 깊숙이 인간에게 더 가까이 오셨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초라한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실 것을 알려준다. 그는 인간 여자의 몸에서 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던 그 하나님의 아들이 이번엔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형상으로 오시는 것이다.
인간의 형상으로 온다는 것은 외적 모습만 인간으로 온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외모가 아니라 그의 성품에 따라 지음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온다는 것은 그의 인생이 인간이 가진 연약함을 오롯이 가지고 고통과 시험을 몸으로 겪어서 우리를 이해하고 위로하신다는 약속이다(사 53:3-5; 히 4:15).
하지만 이사야가 예언하는 “아들”은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사실은 “처녀”가 잉태한다는 약속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처녀”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알마(המלע)”가 현대 성서학자들에게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히브리어 단어는 반드시 동정녀를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아직 혼인 전에 아버지의 집에 살고 있는 결혼 적령기의 여성을 의미하고, 당시 사회에서 결혼하지 않은 결혼 적령기 여성은 일반적으로 성 경험이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사야가 사용한 “알마”라는 단어에 동정녀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또한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역이 “알마”를 “파르테노스(παρθένος)”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동정녀를 의미하고, 마태도 이 헬라어 단어를 그대로 인용했다.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라는 예수의 이중적 측면은, 그의 존재와 사역의 이중성으로도 나타난다. 그는 왕으로 왔지만, 섬기고 배신당하고 버림받았다. 그는 구원하기 위해 왔지만 동시에 심판하러 왔다. 그는 축복하기 위해 왔지만, 동시에 저주하기 위해 왔다. 그는 공감하고 위로하기 위해 왔지만, 꾸짖으러 왔다. 신-인이라는 모순된 본성만큼이나 구원-심판이라는 모순된 사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하나라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이다. 그러나 이사야 6-8장의 문맥이 이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이사야 6장 9-10절은 불신앙과 불순종에 빠진 이들의 강퍅한 마음이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멸망의 길에 들어설 것임을 선포한다. 바로 이어 7장 1-9절에서 아하스가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받았지만, 7장 12절에서 이를 믿지 않고 거절했다. 그때 하나님이 구원 약속을 변개하시지는 않았지만(7:16), 그 구원을 통해 새로운 심판이 다가올 것을 선언하신다(7:17 이하). 그러나 아하스는 임마누엘의 약속을 듣고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날도 세상은 아하스처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동정녀 탄생도, 예수의 신성도 이해하지 못한다. 믿음과 순종 없이는 하나님도, 하나님의 뜻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는 자의 구원이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 된다. 교회 안의 축복이 교회 밖에선 저주가 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그럼에도 예수는 누구든지 믿고 구원을 받기 원하셨고, 누구에게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사도들과 초대교회도 그 뜻을 이어받아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도 예수를 전하여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었다. 연말이 다가올수록 고조되고 설레는 분위기가 마치 온 세상이 성탄절을 기다리고 기뻐하는 것 같은 착각을 주지만, 세상의 관심은 예수의 탄생이 아니라 예수 없는 쾌락과 만족에 있다.
세상은 오늘도 성탄절에 예수의 탄생 소식을 듣고, 교회 밖에서 교회 안으로, 심판에서 구원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교회는 성탄절에 교회가 그 주인공 예수를 바로 전하고, 성탄절의 참 의미를 알리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리고 이는 예수 자신이 본을 보이셨듯이, 사랑과 섬김을 동반한 기도와 말씀 선포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