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아짐의 자리

빌립보서 2:6~8 베들레헴 ‘예수탄생교회’ 출입구 높이가 겨우 1.2m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선 누구라도 자기를 낮춰야

2024-12-18     조병재 목사 (서울지방 · 도봉교회)

성지순례 중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 앞에는 구유광장이라고 부르는 넓은 광장이 있고, 그 광장 끝에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성곽 형태의 예수 탄생교회가 서 있습니다. 그 길이가 52m나 되고 폭도 24m나 되는 큰 규모의 교회입니다.

인상적인 것은 이 교회의 출입구입니다. 높이가 1.2m밖에 되지 않아 겨우 한 사람이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문의 이름도 ‘겸손의 문’입니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본당이 나오고, 본당에서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면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자리가 있는데, 마치 아궁이처럼 깊이 파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보려면 무릎을 꿇어야 하고 손으로 만져보려면 거의 엎드려야 합니다. 

저는 그때 그곳에서, 이 땅에 탄생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 누구라도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낮아짐의 자리요, 그 낮아짐의 자리에서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잠시 묵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실제로 과거 로마 황제도 이 예수 탄생교회를 찾았을 때 말에서 내려야 했고,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교회 출입문을 통과해야 했고, 아궁이 같은 곳에 엎드려야 했습니다. 아무리 높은 권세를 가진 사람도, 세상에서 존귀한 명성을 가진 사람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부귀를 손에 쥔 사람도 모두 자기를 낮추어야 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여기에 하나의 역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지극히 높은 분으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가축들의 여물통인 구유에 누이셨고, 포근한 담요나 이불이 아닌 가축들의 먹이인 꼴 위에서 주무셔야 했습니다. 이렇듯이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낮은 자리에 오신 예수님께서 지금 가장 높임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친히,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낮아짐의 자리에서만 진정한 높임이 있는 것입니다. 낮아짐의 자리에서만 참다운 존경이 있고, 낮아짐의 자리에서만 진실된 섬김이 있고, 낮아짐의 자리에서만 완전한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낮아짐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길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하는 길이자, 기독교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길이기에, 이 땅의 모든 교회와 신앙인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신앙적 자세요, 성탄의 주님을 찬양하는 마땅한 자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탄절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고 아는 자는 낮아짐의 자리에 서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 낮아짐의 자리는 어떤 자리일까요? 예수님의 낮아지신 성육신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본문(빌2:6~8)을 통해 3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자기 부인(否認)의 자리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2:6). 이 증언은 예수님께서 본래 하나님이시지만 더 이상 당신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여기지 않으시기로 결단하셨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자기 부인’을 말씀하시는 것인데, 그러므로 성탄은 예수님의 ‘자기 부인’으로부터 시작된 사건인 것입니다. 

그뿐이 아니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이 하나님이시라고 스스로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나중에 믿음의 눈이 열린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예수님을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한 일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대접을 요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철저하게 인간으로 사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 부인’의 모습에서 진정한 낮아짐의 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매스컴을 통해 자주 등장하는 단어 중에 ‘갑질’이 있습니다. 네이버 사전을 보면 이 ‘갑질’에 대해서, “갑을관계에서의 ‘갑’에, 어떤 행동을 뜻하는 접미사인 ‘질’을 붙여 만든 말로, 권력의 우위에 있는 ‘갑’이 권리관계에서 약자인 ‘을’에게 하는 부당 행위를 통칭하는 개념”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에 따라 ‘울트라 갑질’이니 ‘슈퍼 갑질’이니 하는 말들도 있고, 자기가 갑이라고 생각하며, 갑이라 주장하고, 갑처럼 군림하려는 마음을 말하는 ‘갑 마인드’라는 말도 있는데, 사실 모든 갑질은 이 ‘갑 마인드’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갑 마인드’로는 결코 낮아짐을 알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그러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처럼 낮아짐의 자리에 서려는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주신 말씀인데, 오늘 우리 시대의 말로 표현해 본다면, ‘자기 부인’이란 ‘갑 마인드를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는 낮아짐의 자리가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의 합당한 자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낮아짐의 자리는 자기 비움의 자리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7).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비우셨을까요? 하나님의 본체를 비우셨을까요? 결코 아니죠.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셨어도 여전히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품을 비우셨을까요? 역시 아니죠.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성품을 유지하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비우셨을까요? 그 답은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특권과 권능을 비우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으로서 받으셔야 할 특권을 비우심으로 멸시와 천대를 다 받으셨다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으로서 행사하실 권능을 비우심으로 연약한 인간에게 체포되셨고, 온갖 고난을 겪으셨고,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 비움을 통하여 진정한 낮아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자기 비움의 자리가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의 합당한 자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비움은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요, 거저 받았으니까 거저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구하기 전에 먼저 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한 비움의 기쁨과 평안은 찾아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낮아짐의 마지막 자리는 자기 죽음의 자리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절정은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으로 인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죽으시기 위해 자기를 낮추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마다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죽을 때 누군가가 살게 되는 것이요, 그 가정이, 그 교회가, 그 나라와 민족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내가 사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 고백을 의역하면, “나는 매일 죽으며 산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죽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죽어야 남을 섬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죽어야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죽어야 구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마땅한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날마다 죽는 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요, 우리의 육체를 죽이면 우리의 영혼이 살아납니다. 내 자신이 죽으면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그것이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의 합당한 낮아짐의 자리인 것입니다. 

모쪼록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비우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죽으며 사는 낮아짐의 자리에서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생명의 영성이 성결 가족 가운데 회복되기를,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기 위해 이 땅에 탄생하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