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1429)진짜 ‘감사 대박’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선물을 받은 채무자 항상 받은 은혜를 찾으며 매사에 감사하고 이웃들에게 다시 흘려보내며 살아가야 해

2024-11-13     이의용 장로 (전 국민대 교수 · 아름다운동행 감사학교장)

기독교 계통의 방송국 PD를 오래 하다 은퇴한 친구가 있다. 간증 프로그램을 오래 담당해왔기에 만날 때마다 짓궂은 질문을 한다. “그 간증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아무개는 지금 어찌 됐소?”라고. 

처음에는 ‘비밀’이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요즘엔 숨은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놓는다.  그의 간증(?)에 따르면, 충격적인 사연으로 청취율을 높였던 이들보다는, 잔잔한 사연으로 청취율이 낮았던 이들이 간증 후에 잘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죽을 병이 나았다고 간증한 어떤 이는 건강을 돌보지 않고 이곳저곳 간증하러 다니다가 병이 재발해 세상을 떠났고, 간증으로 인기가 높아진 어느 연예인은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가 있고, 성공 신화의 어느 주인공은 횡령죄로 감옥에 가 있고…. 

최근 뉴스를 보니 간증으로 유명해진 어느 연예인이 간증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고 한다. 거짓 간증에 가책을 느낀다며.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이라고만 믿으면 나 중심의 ‘신념’이 되기 쉽지만, 내가 과연 하나님의 편인가를 점검하며 살면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된다. 신앙을 수단으로 여기면 신념으로 전락한다. 

간증은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간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다음의 삶’이다. 엄청난 번영, 성공, 신비한 체험으로 교인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기대감을 유발하는 간증은 강단이나 방송에서 하지 말고 삶으로 보여주면 좋겠다.

얼마 전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감사 운동가들이 모여 감사운동 사례를 나눈 적이 있다. 학교, 군대, 기업, 교도소, 교회 같은 곳에서 ‘감사’를 가르치고 확산시키는 이들 덕분에 우리 사회가 그래도 이만큼 버티고 있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동의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첫째는 운동의 초점이 “감사를 하면 자신에게 무엇이 좋은가?”에 맞춰져 있다는 것. 둘째는 감사를 어떤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여긴다는 것. 셋째는 감사를 주술적인 것으로 여긴다는 것.

“감사는 감사를 부른다” “감사하면 복을 받는다”며 “감사 대박!”을 강조한다. 결과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감사는 없던 것이 갑자기 생겨난다기보다는, 그동안 안 보이던 것이 보이는 것이다. 감사 근육이 발달하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감사거리가 보인다.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그 별을 찾는 이들에게만 보이듯이, 우리 삶 속에 수많은 은혜가 숨겨져 있지만 그것을 찾아내려는 이들에게만 은혜로 보인다. “(이미)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감사(感謝)는 고마운 마음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그러니 감사는 청구서(기복주의)가 아니라 영수증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이미 받은 감사거리(은혜)를 찾아낼 것인가?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고, 그것을 배달해준 이웃을 향한 고마움의 표현이다. 고마움의 표현을 어떤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군대의 전력 강화하기, 경영의 성과 높이기, 건강을 증진하기, 사업에 성공하기, 성적 올리기를 위한 수단으로 감사를 활용하는 것은 기독교의 감사와는 거리가 멀다.  

두 개의 화병에 꽃을 꽂아놓고 한쪽에는 “감사하다”는 등의 긍정적인 언어를 들려주고, 다른 한쪽에는 “나쁘다, 화난다” 등의 부정적인 언어를 들려주면 앞의 꽃은 생생히 자라고 뒤의 꽃은 말라 죽는다는 설명은 감사를 주술적인 것으로, ‘긍정의 힘’ 정도로 오해하게 한다. ‘긍정’이 감사의 문을 열어주지만, 그 자체가  주술적인 힘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매순간 많은 선물을 받고 사는 채무자다. 그러므로 이미 받은 은혜를 찾아 어떤 상황(범사)에서도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나아가 그 은혜를 이웃들에게 다시 흘려보내며 살아야 한다. 그게 진짜 ‘감사 대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