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때문에 창자가 끊어진 예수님

자기 백성들을 환대하시는 하나님 그 실천은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것

2024-10-30     하도균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전도학)

환대는 기독교의 기본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환대로 인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일방적인 환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환대를 통하여 은혜를 입었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나그네였던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고귀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떠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환대하셨을까요? 그것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라는 표현이 종종 나타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사용하신 “불쌍히 여기다”라는 단어는 고전 헬라어에 용례를 찾을 수가 없어서, 처음 그 단어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에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야 했다고 합니다. 그 단어가 바로 “스프랑크니조마이”로서,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스프랑크”는 ‘내장’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예수께서 주로 사용하신 단어였습니다. 주님의 가슴앓이를 표현하는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동사로 사용될 때 그 의미는, ‘창자가 타들어 가다’는 뜻이 됩니다. 한 마디로 내장이 아프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너무 안타까울 때, ‘애간장이 탄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불쌍히 여기다’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자리에 환대가 베풀어지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대표적으로 마태복음 14장 14절에 보면,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5장 32절에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주신 모습이 나옵니다. 또한 마태복음 20장 34절에는  소경 둘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사건이 나옵니다. 

특별히 마태복음 9장 36절을 보면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불쌍히’라는 단어는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창자를 의미하는 헬라어, ‘스프랑크’이며, 예수께 모여든 무리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여기시며 그들과 함께 고통과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환대의 기본 자세입니다. 

우리에게 ‘목자 없는 양’이란 표현이 별로 실감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들은 목자가 없으면 존재하지 못합니다. 양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방향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밖에 풀어놓으면, 시간이 되어 집을 찾아옵니다. 그러나 양은 쉽게 찾아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방향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인을 표현할 때,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상반절)” 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양은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없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자기 보호본능이 있습니다. 신체의 색깔과 유사한 주변의 환경에 은거하여 스스로 보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양은 자기보호본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양의 털은 쉽게 오염됩니다. 양을 멀리서 보면 깨끗한 것 같지만, 가까이 보면 잘 넘어지고 오물들이 털에 묻기 때문에 쉽게 오염되어 세균의 온상이 됩니다. 

그러나 양에게는 목자만 있으면 됩니다. 목자만 잘 만나면 방향감각을 갖게 되고, 목자의 지팡이로 보호를 받으며, 더러운 자리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자가 없으니 이 양들이 얼마나 천덕꾸러기가 되었겠습니까?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시는 아버지는 얼마나 아프실까요? 그러므로 “목자의 심정이란 가난한데 자식이 많은 엄마의 심정”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불쌍히 여기다’라는 단어가 영어로는 어떻게 번역되었을까요? 컴패션(compassion)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여기에서 com은 ‘함께’라는 뜻이고, passion은 ‘아파한다’는 뜻이다. 즉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문제를 나눈다는 것이 ‘불쌍히 여기다’의 의미입니다. 그러한 긍휼이 있는 자리에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프레드릭 부크너(Frederick Buechner)는 ‘불쌍히 여김’이라는 단어를 ‘궁극적으로 당신에게 평화와 기쁨이 없는 한, 내게도 평화와 기쁨이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이라고 정의합니다. ‘네가 평화롭지 않으면 나도 평화롭지 않다는 마음, 네가 기뻐하지 않으면 나도 기뻐할 수가 없다는 마음’, 이 마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을 향하여, 타인을 향하여, 불쌍히 여기는 바로 그 자리에 새로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께서 파송하신 예수님의 제자이며,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성경은 힘들고 어려움이 있는 자들이 예수 앞에 나올 때, 불쌍히 여겨달라는 외침을 곧잘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백이 있는 자리에 예수께서는 치유와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모두 작은 예수가 되어 세상을 바라보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어 환대를 베풀며 생명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외치며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함께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