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성수에 목숨 건 정영미 권사(군산중동교회)

“돈 많이 버는 것보다 좋은 건 예배-봉사”  46년간 예배 불참 한번도 없어  유년부 등 교사로만 30년 섬겨  2017년부터 교회 살림 책임져 “시어머니 1순위 후보가 꿈”

2024-10-02     박종언

삶의 최우선 순위를 ‘예배’에 둔 열혈 신앙인이 있다. 바로 정영미 권사(군산중동교회·사진)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교회에 처음 나온 후 46년간 해외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예배에 빠져본 적이 없을 정도로 예배에 목숨을 걸었다. 유치부 교사 20여 년, 유년부 교사 5년, 고등부 교사 3년 등 30년 가까이 교회학교 교사로 헌신하는 등 봉사에도 앞장서고  있다. 

설명만 들었을 때는 독실한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모태신앙일 것 같지만 정영미 권사는 오히려 정통 불교 집안에서 자랐다. 정 권사는 “옛날에는 교회에서 예배 시작 전에 종을 울렸는데 종소리가 들릴 때마다 부모님이 ‘교회에서 너 부르는 소리인 것 같다. 얼른 교회 가라’고 하셨다”며 “오히려 가끔 가기 싫어서 꾀를 부리면 혼날 정도로 저를 교회에 보내셨다”고 말했다. 

이후 정 권사의 전도로 부모님 모두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어릴 때 왜 그렇게 교회에 보냈는지 물었지만 답은 끝내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부모님의 강권으로(?) 교회에 출석하게 된 정 권사에게 예배는 곧 삶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되었고 교회는 안식처가 됐다. 자연스럽게 초중고를 거쳐 청년부에 다니면서 봉사도 열심히 참여하는 등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교회학교 교사를 비롯해 찬양팀과 성가대, 경로대학 등 다양한 봉사를 감당하는 일도 기쁨이었다. 

안정된 신앙생활만 했을 것 같은 정 권사이지만 신앙의 위기도 있었다. 1995년 친정 아버지가 대장암으로 투병할 때다. 정 권사는 “하늘이 무너진 것만 같았고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해 전교인 수련회에서 받은 말씀을 붙들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는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눈물만 나오는데 하나님이 ‘영미야,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네가 힘들면 나도 힘들단다’라는 말씀을 주셨다”며 “나 혼자 아파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했다.

대학 졸업 후 취업할 때도 정 권사의 눈은 늘 교회에만 향해 있었다. 그는 “보험사 손해사정사로 일할 때 회사 옥상에서 교회가 보였는데 매일 ‘하나님, 저는 이곳이 아닌 교회에서 봉사하고 싶어요’라고 투정부리며 간절하게 기도했다”고 말했다. 이런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일까. 정영미 권사는 그토록 원하던 교회에서 마음껏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2012년 교회 사무원 자리를 제안받은 것이다. 정식 직원이 아닌 계약직이었지만 너무 기뻤다. 처음에는 계약직이었지만 성실함과 능력을 인정받은 정 권사는 곧 정식직원이 되었고 2017년부터는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다.

2,000명이 넘는 성도와 10억원이 훌쩍 넘는 교회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눈코 뜰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지만 감사하게도 한번도 사람과 재정 때문에 힘들거나 시험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정 권사는 “사무장이라고 하면 행정 일만 할 것 같은데 시설 관리부터 재정 지출, 심지어는 찬양팀에서 드럼 칠 사람이 없어 직접 배워 찬양팀원으로도 활동한다”며 “바쁜 일상이지만 ‘정영미가 있어 다행이야’라는 말을 듣는 순간 모든 피로가 사라진다. 

사무장으로 은퇴를 몇 년 남겨두지 않은 정 권사이지만 미련이 없다고 한다. 그는 “나에게는 그동안 애쓰고 수고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이 있다”며 “꼭 정년을 채워 은퇴하고 싶은 마음이나 욕심도 없고, 나에게 가장 큰 보람을 느끼게 해준 교육부서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딱 한가지 욕심이 있다면 청년들에게 ‘정영미 권사님을 본받고 싶다’는 말을 듣고 싶다”며 “예전에는 청년부가 기피하는 시어머니 1순위가 권사였다는데 ‘정영미 권사님은 괜찮아’라는 평가를 듣고 싶다”고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