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중을 고려하여 읽으라

2024-09-11     정재웅 교수 (서울신대 설교학)

경험이 부족한 설교자는 ‘자기가 무엇을 전할까’를 고민하지만 경험이 풍부한 설교자는 ‘청중이 무엇을 들을까’를 고민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설교를 위한 본문 해석의 마지막 단계가 청중을 고려한 해석임을 보여준다. 아무리 정확하게 본문의 의미를 해석하고 역사적 문학적 맥락을 잘 살펴서 적절한 신학적 메시지를 전한다고 해도 청중에게 들리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이는 신설교학자들만의 주장이 아니라 보수적인 강해설교학자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달라스 신학교의 설교학 교수인 라메쉬 리처드는 설교가 삶을 변화시키는 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신학적으로 정교한 설교를 한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강해설교의 대가 해돈 로빈슨 역시 청중을 고려하지 않은 설교로 인해 자신이 겪었던 참담한 실패를 고백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이 실패했던 것은 본문에 대한 주석적 작업에 집중한 나머지 본문이 청중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해석하는 작업은 소홀히 한 까닭이라고 고백한다. 

설교가 허공에 대고 외치는 독백이 아니라 청중이라는 대상에게 전하는 커뮤니케이션 사건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에 이러한 실수는 치명적이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본문과 상황 둘 다 균형있게 해석하고 양자를 긴밀하게 연결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실상은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설교자에 따라 청중의 마음을 읽는 눈은 어두운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또한 일주일에 평균 10여 편의 설교를 해야하고 다양한 목회적 돌봄과 사무를 감당해야하는 많은 한국교회 설교자들에게는 필자가 제시하는 해석적 작업들을 진행할 물리적 시간이 부족할 수 있다. 대개 이런 경우 본문의 의미라도 잘 전할지 혹은 청중들의 마음에 와 닿는 메시지를 전할지 양자택일을 해야하는 처지에 놓인다. 이 때 만약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끄집어 내는 주석적 작업에 시간을 쏟다보면 말씀의 적용과 상황화, 현재화가 부족할 수 있다. 반대로 청중의 상황을 너무 고려하다보면 본문 해석에 소홀하거나 최악의 경우 청중에게 전하려는 메시지에 맞춰 본문의 의미를 왜곡시킬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자에게 안전하고 익숙한 방식은 본문에 집중하는 것일 수 있다. 어설프게 청중을 분석하고 부족한 시간을 쪼개 본문과 청중 둘 다 맞추려고 하다가 본문해석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청중에게도 외면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본문 해석이라도 정확하게 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목회 경험이 부족한 설교자들은 신학교 내내 본문해석에 관해서는 성서학 수업들을 통해 훈련을 받았기에 익숙한 편이지만 청중의 마음을 읽고 이해하는 것은 무척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는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는 청중을 고려하고 청중에게 들리는 설교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들려야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복음을 누구에게 들려줄 지도 모르고 설교한다면 과녁을 보지 않고 총을 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명중탄을 쏘려면 어떻게 하면 총을 원하는 방향으로 쏠 수 있는지도 배워야 하지만 과녁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잘 봐야 하는 것처럼 본문으로부터 정확하게 메시지를 추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설교의 메시지가 영혼을 변화시키는 복음이 되게 하려면 설교를 듣는 청중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다음 시간에는 청중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분석하고 설교를 위한 본문 해석에 반영할 수 있을지 살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