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에 결박되어 있는가?

(삿 16:1~31)

2024-09-11     임건혁 목사 (서울강동지방·잠실효성교회)

사사기 16장은 삼손에 대한 이야기로, 사명을 잃고 헛된 정욕에 결박된 그의 보습을 보여주고 있다. 결박이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나오는데, 삼손을 진정 결박하고 있는 것은 헛된 정욕임을 알 수 있다. 사사요 나실인으로서 사명에 결박되어 살아가야 하는데, 여인들과의 쉬운 사랑에 빠져 사명을 뒷전에 두고 말았다. 딤나의 이방 여인을 사랑하여 결혼하더니 이후 가사에 있는 한 기생을 사랑했고(삿 16:1), 또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하는 여인을 사랑했다(삿 16:4). 물론 사랑 자체는 문제일 수는 없다. 하지만 나실인이요 사사로서 그 사랑의 대상이 이방 여인이라는 것과 진실한 사랑이라기보다는 정욕에 이끌린 사랑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무엇보다 문제는 이로 인해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명을 뒷전으로 두고 제대로 감당하지 않았는데, 곧 여인과의 사랑으로 인해 여러 차례 위험에 빠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짐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게 헛된 정욕에 묶여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블레셋 사람들이 줄로 묶는 결박은 그 힘으로 여러 차례 끊었지만, 정작 헛된 정욕에 묶여 있는 결박은 끊지 못했다. 급기야는 그의 힘의 근원이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잇는 마지막 보루라 할 수 있는 머리카락의 비밀까지도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 공개하여 그 머리카락이 다 밀리고 말았다.

결국 하나님은 그에게서 떠나시고, 하나님을 통해 그에게 주어진 힘은 소멸되어 그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혀 눈이 뽑히고, 놋줄에 매여 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삿 16:20~21). 물론 옥에서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고(삿 16:22),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한번 기회를 얻어서 삼손은 마지막 온 힘을 다해 블레셋 사람들을 멸하며 함께 죽었지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삿 16:31) 삼손이 이십 년 동안 사사로 있었지만, 다른 사사들의 경우처럼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말씀도, 또한 이스라엘에 평안이 있었다는 말씀도 없다. 사명이 아닌 헛된 정욕에 매여 살아간 결과였다.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막 15:1) 예수님은 무엇에 결박되셨는가? 당장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권세의 줄에 의해 결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정 예수님을 결박한 줄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권세의 줄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사랑과 구원의 줄이었다. 

곧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결박을 끊으실 수 있으셨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사랑과 구원 때문에 그 결박을 끊지 않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다. 결코 우리를 향한 사랑과 구원의 결박은 끊으실 수 없으셨던 것이다.

우리를 향한 사랑에 결박되셨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는 무엇에 결박되어 있는지 돌아봐야 하지 않는가? 삼손처럼 헛된 정욕에 결박됨도 어리석은 일이요, 또 오늘의 황금만능주의 사상에 갇혀 돈에 결박됨도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를 결정하며 바울이 전했던 그의 고백을 가슴에 담아야 한다. 사람들의 결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주님 사랑과 복음의 사명에 결박되었던 그의 삶을 우리도 따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