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생명 명령, 생활 명령

(요 11:43~44)

2012-09-12     이재정 목사(익산삼광교회)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신 주님은 두 가지 말씀을 하십니다.
먼저는 죽은 나사로가 묻힌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십니다. 죽음의 장소인 무덤을 향해, 죽음의 본체인 시체를 향해 하시는 명령입니다. 지금까지 무덤이나 시체를 향해 살아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좋은 수의를 입혀 주는 일이거나 기념비석을 세우고 무덤 관리나 해 줄 수 있는 정도입니다.

죽음이라는 정체를 명령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도무지 없는 노릇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 죽은 사람이 묻힌 무덤, 죽음의 정체인 시체를 향해서 살아 날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 명령을 생명의 명령이라고 이름 지어줍니다. 이 명령을 듣고 죽어 무덤에 묻혀 썩어가던 나사로가 살아서 나옵니다.

이 명령은 죽음을 깨뜨리고 생명을 창조하시는 주님 사역의 본질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죽음의 결박을 깨뜨리시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 때문에 죽음은 더 이상 사람을 영원히 가두는 감옥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도 생명을 살리시는 주님의 명령을 듣고 새생명을 얻어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세상 어떤 종교의 가르침이나 탁월한 지도자, 철학적 과학적 가르침으로도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죽은 생명을 살리실 수 있습니다. 주님만이 죽음에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나사로가 살아 나오기는 하지만 산 사람의 역할을 못한다는 점입니다. 전신은 베로 동이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여있으니까요. 손발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없고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말할 수도 없습니다. 살았으나 산 생명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는 생명체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두 번째로 하신 명령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입니다. 이 명령은 둘러 선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살았지만 산 생명 구실 못하는 나사로를 둘러 선 사람들이 풀어주어야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달려들어 얼굴의 수건을 풀어 주고 전신을 둘러 싼 베를 풀어서 보고 듣고 말하며 움직이도록 해 주었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 난 후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명령은 생활명령입니다. 둘러 선 사람들은 교회가 아닐까요. 그러므로 이 명령은 교회를 향한 명령이라고 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동일한 명령이 주어진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그 부활의 생명으로 영혼 구원받은 성도들이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많은 사람들은 무덤에서 나오는 나사로처럼 생명은 살아났지만 생활이 결박당한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29:4). 하신 말씀처럼 영적인 것을 보지도 듣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영성은 결박당한 생명입니다.

더불어 신앙은 있다지만 신앙생활은 바르지 못한 경우입니다. 녹지 않아서 짠 맛을 내지 못하는 소금, 장애물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하는 등잔, 줄기에서 잘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 썩지 않아서 싹을 낼 수 없는 씨앗, 집을 떠난 아들, 잃은 은전, 길 잃은 양, 옥토가 아닌 곳에 떨어진 씨앗 모두가 결박당한 모습입니다. 제 본연의 기능을 낼 수 없지요.

교회를 우리 신체에 종종 비유합니다. 죽어가는 불신자 이웃을 보지 못하는 눈, 그들에게 복음을 담대히 말하지 못하는 입술,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발, 기도로 꿇지 않는 무릎, 뻗지 않은 팔, 펼치지 않은 손, 짐 지지 않은 어깨 모두가 결박당한 상태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결박을 풀어주도록 명령을 받습니다. 영혼 구원 받아 교회 안에 있지만 그 신앙을 생활로 드러내지 못하는 무기력한 성도들의 결박을 풀어 신앙을 생활로 살아 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 일은 성도들 서로가 이룰 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