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오개1416)“저에게 당신은 무엇입니까?…
▨… “저에게 당신은 무엇입니까?… 당신께 제가 무엇이길래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하시고 그리하지 않으면 제게 진노하고 커다란 비참으로 벌하겠다고 경고하기까지 하시나이까?”(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한글·김남준) 우리 성결인들은 끊임없이 질문해 왔다. 인간의 이상과 구원을 실현하는 것은 논리적인 이성인가 아니면 회의를 이겨낸 사랑인가를. 이 질문에 신학적으로 하자 없는 답을 마련하려고 존 웨슬리를 인용하고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교리를 세우려고 몸부림쳐 왔다.
▨… 그러나 오늘 알고리즘이 하나님이 되는 도스토옙스키의 이반도, 알료샤도, 대심문관도 없는 이 시대에 우리 성결인들은 다시 물어야 한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아니, 교도소에 갇힌 그분에게 대심문관이 “당신이 인류에게 남긴 짐, 즉 진리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짐은 인간에게는 너무 무겁다”라고 빈정거려도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임을 누가 부정할 수 있는가?
▨… 토론토대 학생들에게 ‘내 인생을 바꾼 교수’로 뽑힐 만큼 인정받고 있는 심리학자 조던 B. 피터슨(『12가지 인생의 법칙』)에 의하면 도스토옙스키는 제정 러시아 때의 러시아정교회가 합리성과 지성에 패배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내용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믿음과 반대되는 주장을 공격하려고 억지를 부리지 않았고, 속임수나 풍자를 동원하지도 않았다. 다만, 수련 수도자로서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실천하려는 알료샤의 도덕적 선의가 이반의 허무주의적인 비판적 지성에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마무리했다.
▨… 도스토옙스키는 교회가 아무리 부패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자비로운 면과 실용적인 가치가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참조·12가지 인생의 법칙) 또한 그리스도 정신과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 말씀은 과거나 당시에나 여전히 교회 안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는 이해에 서있었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도스토옙스키의 인간 이해가 사랑의 실천과는 거리가 있다 하더라도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으로 인한 환멸이 아무리 쓰라려도 인간에 대한 희망의 근거는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아우구스티누스가 뒤늦게 깨달은)이 있는 한 희망의 근거는 우리에게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어느 목사의 소송제기나 서울신대 파동도 우리의 희망을 결단코 무너뜨리지는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