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로 북적이는 북녘 코앞 ‘컨테이너 교회’
문산읍 빌립보교회의 다음세대 사역 2010년 개척하고 바로 초등학교 전도 사탕 나눠주느라 1년 200만원 들기도 60명까지 부흥, 이젠 교회 대들보 성장 작년 건축 통일로 새성전서 통일 준비 “북한 아이들이 복음듣고 남한 적응하게 북한선교 사역자들과 구체적인 계획 중”
서울보다 개성이 더 가까울 정도로 북한을 코 앞에 둔 교회. 어른보다 청소년이 더 많아 지금보다 미래가 더 기대되는 교회. 지난 해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통일로에 예배당을 새로 지은 후 다음세대와 북한을 품으며 새 도약을 다짐하는 빌립보교회의 사역이 주목된다.
직장인 선교사에서 목회자의 꿈 키워
빌립보교회의 곽창훈 목사는 직장을 다니다가 신학대학원에 진학한 늦깎이 사역자이다. 현대모비스에 다니던 그는 어느 날 목회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남들이 부러워하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서울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곽 목사는 “원래 꿈은 직장인 선교사였다”며 “점심시간 때마다 회사에서 전도도 하고 성경공부도 했었는데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다. 그래서 사직서를 내고 바로 신대원에 진학했다”고 회고했다.
대기업에 다니면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하며 순종한 것이다. 이미 가정도 꾸렸지만 생계나 앞으로의 삶은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으로 믿고 부르심에 순종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당장 월급이 끊기자 수백만원에 달하는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가 힘겨웠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사구체신염을 앓게 되면서 투석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진단까지 받게 되었다. 다행히 신장 수치가 좋아져 투석은 면했지만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
곽 목사는 “당시에는 힘들다고 느꼈는데 돌아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고난을 이겨내는 법을 배운 것 같다”며 “그런 과정이 없었으면 교회 개척과 사역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웃어 보였다.
교회개척은 하나님의 선물
곽창훈 목사는 신대원 졸업 후 2009년 목사안수를 받고 2010년 바로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에 교회를 개척했다. 곽 목사는 “도봉교회에서 청년부 사역을 맡아 30명에서 90명으로 부흥하는 경험도 하고 감사한 시간이었지만 다시 건강이 나빠져 당분간 쉬려고 준비하던 중 하나님께서 교회개척이라는 꿈을 갖게 하셨다”며 “무엇보다 ‘교회개척은 선물’이라는 말씀을 주셨고 선물이라면 순종하겠다고 결심했다”고 고백했다.
이전 사역지가 도봉교회였고 성락성결교회 출신인 그가 연고도 없고 외진 문산읍에 교회를 개척하게 된 과정 자체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곽 목사는 “교회 개척을 결심하고 용인 등 여러 곳을 알아보던 중 우연히 문산에 오게 되었는데 부동산 중개업소를 운영하던 한 장로님을 만나게 되었다”며 “교회 개척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에 지역 소개와 여러 곳을 추천해주시는데 ‘이곳이 바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기도처로 시작해 8개월만에 첫 성도
문산읍에서의 교회개척을 결정한 곽창훈 목사는 먼저 이사부터 했다. 예배 장소를 구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사부터 결정한 것이다. 한 공장에서 직원 숙소로 사용하던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곽창훈 목사는 “A4 용지에 빌립보교회라고 쓰고 거실 창문에 붙인 후 예배를 드렸다”며 “이전 교회 교인들이 방석 몇 개와 보면대를 헌물해주셔서 그걸 깔아놓고 가족들과 시작한 것이 빌립보교회의 첫 예배였다”고 회고했다.
4개월 간 집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찾아오는 사람 한명도 없는 ‘그들만의 예배’가 계속되었다. 꾸준히 공예배 시간을 지켰지만 주일 아침에 식사 후 가족끼리 모여 예배를 드리는 등 산만한 환경이었다. 가정과 교회가 분리되지 못하면서 목회와 가정생활의 경계도 모호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도봉교회에서 8,000만원을 지원해줘 상가 건물에 예배장소를 마련했다. 이때부터 곽창훈 목사 부부는 매주 전도지 5,000장을 뿌릴 정도로 본격적인 전도에 나섰다. 지역의 아파트에 전도지를 붙이면서 쫓겨나기가 일쑤였고 경찰에 신고당하는 일도 겪었지만 매일 씨를 뿌린다는 마음으로 전도에 열정이었다. 이런 열정이 열매를 맺은 것은 개척 8개월만이었다. 당시 아파트를 청소하던 한 아주머니께서 “교회에 나가고 싶은 할머니가 계신데 꼭 빌립보교회를 소개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곽 목사는 “너무 감사한 일인데 ‘왜 우리 교회를 소개해주고 싶으세요”’라는 말에 “전도지를 그만 붙이라고 해도 다른 분들은 몰래 와서 또 붙이는데 목사님은 약속을 지키더라, 믿을만한 분이라고 생각해서 소개해주고 싶다고 하시더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렇게 빌립보교회의 첫 성도가 된 80대의 노인은 과거 지역에서 유명한 포주였지만 이곳에서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사탕주며 교회학교 쑥쑥 부흥
본격적인 목회가 이때부터 시작됐다. 아직 걸음마 수준의 개척목회였지만 곳곳에서 많은 동역자들이 찾아왔다. 개척 초기부터 5년간 은평교회 청년들이 작은교회 섬김 차원에서 찾아와 동네에 교회를 알리는데 힘써주었고 초기에는 매월 방문해 지역 전도에 적극 나서며 교회에 큰 힘이 되었다. 곽 목사 부부도 인근의 초등학교 앞 전도를 시작해 등교시간에 전교생에게 사탕을 나눠주며 교회를 알렸다.
매일 초등학교 3곳을 돌며 등하교시간에 맞춰 전교생에게 사탕을 나눠주면서 꾸준히 전도하다보니 ‘사탕주는 목사님’으로 유명해지면서 늦게 가면 아이들이 먼저 찾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곽 목사는 “사탕값만 1년에 200만원이 들어갈 정도로 꾸준히 아이들에게 사탕전도를 실시했고 교회학교가 시작될 수 있었다”며 “지금은 학부모들의 반대로 사탕전도를 하지 못하지만 우리 교회의 든든한 일꾼들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학교와 놀이터에서 전도한 아이들 4명으로 교회학교를 시작했다. 교회학교를 시작하면서 곽 목사가 결심한 것은 교회학교만 전담할 풀타임 교역자를 모시는 일이었다.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투자는 좋은 사역자를 모셔오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록 본인은 사역비도 제대로 못받는 상황이었지만 교회학교의 부흥을 위해 결심한 것이다.
그는 “우리 교회만으로는 아이들이 부족하니 주변의 6개 교회 아이들을 모아서 토요일에 교회학교 예배를 함께 드렸다”며 “토요일에는 우리 교회에서 교회학교 예배를 드리고 주일에는 각자 교회로 돌아가서 부모님과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모든 교회의 교회학교가 부흥해서 2년 만에 각자 예배를 드릴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는 기쁨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렇게 시작한 교회학교는 유초등부 60명까지 부흥했고 이후 청소년부로 진학하면서 교회의 기둥이 되어 주었다. 지금도 유초등부와 청소년을 포함해 20여 명의 아이들이 예배드린다. 아이들은 금요철야에배 참석을 시작으로 토요일 예배 후 교회 청소, 주일예배까지 드리는 등 빌립보교회의 든든한 일꾼으로 성장했다. 비록 대학진학과 취업 등을 이유로 외지로 많이 나갔지만 지금도 20대가 스무 명이 넘을 정도로 빌립보교회의 미래는 밝다.
새 성전 건축, 통일 준비 꿈 키워
빌립보교회는 지난 해 문산읍 통일로에 새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통일을 준비하는 또 다른 꿈을 키워가고 있다. 비록 컨테이너로 지은 예배당과 새가족실, 비닐하우스를 개조한 식당 등 아직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품고 통일 이후 사역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교회 건축을 위해 대지를 구입하고 건축까지의 과정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선물이었다. 곽 목사는 “새 성전 건축을 두고 기도하던 중 우리에게 맞는 땅을 발견했지만 교회 통장에 7,580원이 있었다. 전교인이 참석하는 회의에서 이런 상황을 이야기하니 세례도 받지 않았던 새신자가 대지 구입을 동의했다”며 “이후 그 성도가 1,000만원, 강서교회 3,000만원 등 생각지 못한 후원으로 건축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곽창훈 목사는 “통일이 되면 많은 교회에서 북한에 교회를 세우는 비전을 갖고 있지만 우리는 북한의 다음세대를 위한 사역을 준비하고 있다”며 “북한의 어린이들이 빌립보교회에서 복음을 듣고 남한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고백했다. 실제로 빌립보교회 건축 후 북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사역자들이 꾸준히 방문하고 있고 곽 목사도 이들과 교류하며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
곽 목사는 ‘다음세대와 통일 준비’가 목회 사역의 최종 꿈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문산읍의 인구는 총 4만 9천명인데 그중 유아부터 청소년 수가 1만 6천명으로 타 지역에 비해 비율이 높지만 한부모 가정 등 소외된 아이들도 많다”며 “이들을 돌보고 다가올 통일을 준비하며 북한의 학생들도 품고 싶다”고 바램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