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왜라고 물어라

2024-07-10     정재웅 교수 (서울신대 설교학)

사람을 사귈 때 그가 걸어온 삶의 경로에 관해 묻고 듣게 된다. 고향은 어디인지, 부모형제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살면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묻고 듣는다. 이런 대화를 통해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된다. 많은 정보를 축적할수록 나는 그에 대해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아, 난 이 사람에 대해 잘 모르는구나!’하고 깨닫게 된다. 잘 안다는 착각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복기하다 깨닫는 것은 나는 왜 그가 그런 말을 했는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한번도 생각해 본적도 물은 적도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을 깊이 알기 위한 대화에서 “왜”라는 질문을 해야하는 것처럼 성경과 깊은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왜”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왜”라는 질문을 외면하면 지식의 기반은 불안정하고 관계는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성실하게 본문을 읽는 설교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고통스럽게 고문을 당하고 십자가형을 견뎌냈는지 말할 수 있다. 가야바의 관정에 모인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누구였는지, 빌라도에게 대제사장들과 유대지도자들은 어떠한 논리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주장했는지, 십자가형이 로마시대에서 어떤 의미가 있었고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왜”라고 묻지 않으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왜 산헤드린 공회에 있던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은 침묵하였는가?

왜 빌라도는 바라바와 예수 중 하나를 놓아주겠다고 했는가?

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그 수치와 고난을 감수하였는가?

왜 하나님은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셨는가? 이렇게 왜라고 물을 때에 십자가가 우리의 제자됨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폭로하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정치적 이해관계가 때로 죄인을 의인으로, 의인을 죄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 죄를 해결하는 과정은 죄가 낳는 수치와 고난을 인내하고 스스로를 절제하는 것을 동반한다는 것, 죄인까지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희생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왜라고 물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그리고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지 이해하게 된다. 

왜라는 질문은 원인을 찾는 질문이며 본질을 찾는 질문이다. 왜라고 물으며 우리는 인과관계를 파악하며 사태 그 자체가 아닌 그 배후에 담긴 의미를 파악한다. 성경속 인물들이나 하나님과 같은 인격적 존재의 행위에 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질 때에 우리는 인물들의 행동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 하는 과정에 대한 이해와 함께 그러한 행동을 하는 의도, 그러한 행동을 하게 하는 원인과 본성에 대해 파악하게 된다. 그러므로 왜라는 질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으로부터 듣고 전하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질문의 순서다.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왜라는 질문은 사태의 현상을 파악하기 위한 다섯가지 질문(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이후에 이루어져야 한다. 먼저 왜라는 질문에 나름의 답을 하고 나서 다섯가지 질문의 답을 찾다 보면 정해진 답에 사태를 끼워맞추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그러므로 먼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고 나서 그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