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직 목사의 회심과 성결 체험 ④
이명직은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당시 동경성서학원에는 등록금이 없었고, 숙식도 동양선교회가 제공하였다. 대신 학생들은 노동을 해야 했다. 이명직이 맡은 일은 변소였다. 하루는 날씨가 너무 추워서 다른 학생들이 변소 청소를 대충하고 가버렸다. 그런데 이명직은 그곳에 다시 가서 더러운 곳을 조사하여 물로 씻어내고, 그래도 안 씻겨지는 것은 손톱으로 긁어가면서 깨끗하게 청소하였다.(박용규. [한국교회인물사]). 이것보다 더 모범적인 학생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명직의 영적 상태는 한치 앞도 못보는 소경과 같았다. 회심의 경험이 없었고,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보기를 원하지만 볼 수 없는 답답함이 그의 영혼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명직의 회심은 이명헌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다. 1910년 이명헌이 동경성서학원으로 유학을 온 것이다. 그는 35세의 만학도였다. 이명헌은 원래 연동장로교회의 조사(helper)로서, 구리개복음전도관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하여 큰 은혜를 받았다. 1908년 겨울에 개최된 이 부흥집회는 성결교회의 ‘첫 오순절’로 기록될 정도로 큰 은혜가 나타났다. 서울 시내의 선교사, 교역자, 평신도까지 참여하였다. 특히 이 부흥회에서 연동장로교회 신자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 그들은 은혜를 받고 기존의 교회로 돌아갔지만, 반상의 문제로 불거진 교회의 분열과 부흥의 열정을 배척하는 분위기 속에서 받은 은혜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복음전도관을 다시 찾았다. 그 중심에 이명헌 조사가 있었고, 박용희 조사, 원세성 전도인, 남궁경선 여전도인, 배선표, 박제원 등이 함께 했다.
이명헌은 이명직에게 자신의 은혜 체험을 간증했다(허명섭. 이명헌의 회심과 성결 체험. ). 그 간증을 듣고 이명직은 비로소 자신의 더러움을 깨닫게 되었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여러 주 동안 기도했다. 그 와중에 동경성서학원에서 수양회가 열렸다. 강사는 세계적인 부흥사인 쉘함마(E. E. Shelhamer)였다. 자유감리교회(Free Methodist Church) 소속의 쉘함머는 죄에 대해서 무섭게 공격하였고, 중생의 필요성에 대해서 역설하였다. 이명헌의 간증과 기도로 옥토가 된 이명직은 그간 머리로만 알고 있던 것을 가슴으로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던 중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복하며 회개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다. 이제 천국과 지옥, 그리고 인간의 미래에 대한 모든 성경말씀이 그의 마음 속에 분명해졌다. 그의 마음을 덮고 있던 흑암의 구름이 걷히고,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을 체험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훗날 이명직은 회개와 구원의 복음을 힘있게 외칠 수 있었다. “회개는 신앙의 기초이니 회개가 없는 곳에 신앙이 있을 수 없고, 신앙이 없는 곳에 구원이 나타날 수 없다. 회개를 반대하는 자는 분명코 회개의 경험이 없는 자이다. 회개의 경험이 없이 학습 받고 세례 받고 집사 되고 장로 되고 성경공부하여 성경지식 얻고 신학을 배워 목사가 되었으니 그 심적 상태가 교회에 들어오기 전보다 다른 것이 무엇인가?” “교회의 부패는 회개가 없는 까닭이요 회개가 없는 것은 회개를 가르치지 아니한 까닭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명령이니 지체할 수 없고 다른 것으로 대용할 수 없다. 회개는 구원의 문이므로 다른 곳으로 들어갈 곳이 없으니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담으로 넘어가는 자는 도적이요 강도이다.” 회개와 구원의 복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아니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편, 이명직이 일본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그의 집안에도 어둠의 견고한 진이 무너져내렸다. 장남이 일본에 가서 기독교를 믿게 되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장남을 설득했지만 효과가 없음을 깨닫자 ‘제사도 못 받을 바에야 예수를 믿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하고 자진하여 북감리교회에 등록하고, 벙커 선교사에게 세례까지 받았다. 아내(박감은)도 일본에서 남편이 보낸 편지를 받고 신자가 되었고, 북감리교회에 속한 용머리교회에 출석하며 믿음을 키워갔다. 이명직이 전도자의 길에 집중하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고 계셨던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