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직 목사의 회심과 성결 체험 ③

2024-06-19     허 명 섭 목 사 시흥제일교회 · 교회사 박사

기독교의 진수(眞髓)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영광과 권위의 자리에 앉으면 거의 통제불가능한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 영광과 권위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마귀의 유혹으로 추락한다. 늑대가 양의 탈을 쓴다고 양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따라서 ‘결신자’(decisions for Christ)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만으로는 천상의 하나님 나라는 물론 역사 속의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교회 임원, 전도사, 목사, 감독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중생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 교만하며 자기만 홀로 잘난 척한다. 그리고 정직하지 못하고 사곡(邪曲)하며 외식(外飾)한다. 따라서 사람 앞에서는 제법 젊잖은 것 같지만, 홀로 있거나 가정에서는 실패한다. 또한 사치하며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고자 꾸민다. 게다가 그 마음과 입에는 음담패설 비난 거짓말 등이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다(이명직. 『중생에 대한 강화』). 이런 것들은 중생 이전 이명직의 체험적 실존에서 겪으며 빚어진 것이었다.

일본 동경에서 이명직은 칭찬받는 신자였다. 일년 동안 비바람에 개의치 않고 예배에 출석하였고, 좋아하던 술과 담배도 끊었으며, 신약성경도 두 차례나 완독했다. 하지만 간증에 의하면, 그는 음행죄와 같은 내면의 육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러 차례 잘못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의 내면을 보지 못하고 외적인 모습만 보는 사람들은 그를 매우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이명직은 중생하여 넉넉히 천국의 자식이 될 줄로 알았다. 기독교의 진수(眞髓)에 이르지 못한 자들처럼, 그도 역시 기독교의 허상(虛像)에 갇혀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명직은 원래 일본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려다가 법학으로 진로를 수정했다. 그러나 고향집에서 온 편지 때문에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편지의 골자는 “아버지가 경영하던 일이 실패하고 돈이 없어서 매월 말에 부쳐주던 학비를 보내 수 없다. 그러니 빨리 채비를 갖추고 귀국하기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이명직은 동경 YMCA의 총무 김정식의 도움으로 동경성서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1909년 봄, 그의 나이 20세였다. 동경성서학원은 동양선교회가 세운 전도자 양성 기관으로, 동양선교회를 창립한 찰스 카우만과 나카다 쥬지도 공부했던 미국의 무디성서학원을 모델로 삼고 있었다. 성서학원에서는 이론적인 신학을 가르치기 보다 성경 내용과 전도훈련을 강조했다. 처음에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이명직은 궁여지책으로 입학하였다. 당시 이곳에서는 학생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기독교 전도자를 양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훗날 이명직은 성서학원에 입학하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하며, 그곳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열어놓으신 모세의 미디안이었다고 고백했다.

성서학원에 입학할 때까지도, 이명직은 자신의 심령이 흑암의 상태에 있었다고 피력했다. 그는 성서학원에서 보낸 1년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입학 후에 비로소 중생이니, 성결이니 하는 교리를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마치 다른 세계에서 노는 것과 같은 기이함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중생해야 한다는 마음이 없었으며, 나의 사명이 무엇이며, 복음전도자의 책임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도 깨닫지를 못하였다.... 그때 나는 많은 정욕의 시험으로 방황의 생애를 보냈으며, 무의미한 수양을 받으면서 일년을 헛되이 보내 버렸다.”

중생에 대해 배우면서, 이명직은 자신에게 중생의 증거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중생이 되는 지 고민하던 중, 나카다 쥬지 선생의 권유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중생의 증거를 기대하는 마음이 컸다. 그때가 1909년 5월 성령강림절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외적인 형식에 불과했다. 세례 전이나 후나 영육간에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천국이나 지옥에 대해서는 배운 대로 설명하거나 가르칠 수도 있었지만, 믿음이 생기지 않았고 여전히 흑암 중에서 행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