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1406)양자택일 강요에서 대화와 선교의 길로

2024-05-15     강춘근 목사 (인천서지방 · 한국교회)

최근 ‘창조신학’을 둘러싸고 학교와 교단, 신학계와 교계 안팎에서 큰 논란이 일고 있다. 일반 학계와 사회에서까지 논의 주제가 되고 있다. 쟁점은 ‘창조과학’과 ‘유신진화론’이다. 창조과학이 창세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과학적으로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라면, 유신진화론은 진화를 과학적 사실로 인정하되 창조하신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것을 해석하려는 관점을 갖고 있다. 

유신진화론은 진화론을 과학 이론으로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믿지’는 않는다. 유신진화론은 진화론을 그냥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진화론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1859년 찰스 다윈의『종의 기원』이 출판된 후 165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진화론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논쟁과 갈등의 주요 원인이었고 그 논쟁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필자는 창세기와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처럼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다. 문제는 이것을 어떤 논리로 설명하느냐 하는 것이다. 창조를 믿는 신앙고백은 진리에 관한 헌신이지만 이를 설명하는 학문적 이론들은 일종의 가설에 불과하다. 진화론을 합리적인 과학으로 받아들이는 경우에도 과학적 이론이 늘 잠정적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과학 이론은 본질적으로 작업가설(working hypothesis)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창조와 진화의 문제는 양자택일의 대결 관계가 아니다. 조화와 통합을 추구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렇다면 질문해 보자.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진화론을 거부해야 하는가, 아니면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하는가? 신학계와 과학계가 피할 수 없는 큰 쟁점이다. 

필자는 무엇보다 현재의 상황에 마음이 불편하다. 서울신학대학교에서 발생하여 현재의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 상황은 점점 쇠약해져 가는 한국교회와 성결교단의 한 단면이다. 과학과 신학의 문제를 충분히 풀어가지 못하는 신학과 신앙의 미숙함이 안타깝다. 웨슬리 신학이 성서, 전통, 이성, 경험의 네 기둥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서울신대의 신학적 정체성이 허약해진 것과 학문 및 신앙 공동체의 형제들끼리 싸우는 현실이 더욱 안타깝다.

박영식 교수 징계 건으로 촉발된 ‘창조과학’과 ‘유신진화론’ 논쟁 상황은 현재 우리 교단의 범위를 넘어서 신학계와 일반 학계, 교계와 일반 사회에까지 확산되었다. 논란의 쟁점이 크게 두 가지임을 확인하게 된다. 하나는 창조과학과 유신진화론에 관한 신학적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신대라는 학문 공동체 내부에서 벌어진 인간관계의 갈등이다. 

신학적 쟁점인 유신진화론에 관하여 박 교수는 자신의 책『창조의 신학』에서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유신진화론’은 진화론이나 무신론이 아니라 창조와 관련하여 다른 신학적 모델과 구분되는 논리로 도입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측은 계속해서 박 교수의 신학적 정체성을 문제로 삼고 있다.

깊이 아쉬운 점은, 우리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과 관련하여 객관적이며 중립적인 입장에서 징계 기준을 마련하는 절차가 없었다는 것이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신학적 토론 과정이 없었다. 이 문제로 3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학교는 신학적 정체성 검증을 위한 기준을 마련하지 못했다. 

늦었지만 이번 기회에 서울신대에 재직하고 있는 신학자들뿐 아니라 학교 밖의 우리 교단 신학자들까지 함께 참여하는 신학적 토론을 통하여 교단 신학의 정체성을 세우는 계기로 삼기를 바란다. 

기독교 신학이 지금까지 걸어온 ‘신앙의 이해’를 망각하고, 누군가가 지위와 권력을 앞세워 신학과 과학, 계시와 이성, 은혜와 자연을 모순과 대결의 구도로 설정하면 ‘신학적 혼란’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만일 성서문자주의에 근거하여 현대 과학의 결실을 부정하고 지구의 연대를 6천 년으로 축소시켜 버린다면, 성결교회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며 선교의 길을 스스로 차단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