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시론1406) 약자는 모른 체, 부자만 되려는 교회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역사를 움직이는 위대한 모습이고 시대의 아픔도 함께 짊어졌었다
어릴 적 다녔던 교회는 정통적인 장로교회였다. 당시 장로들의 기도는 상당히 길었다. 5분은 족히 넘었을 것 같고, 기억으로는 10분은 했던 것 같다. 장로들의 기도는 항상 천지를 창조하시며, 역사의 주인이 되시며, 전지전능하사 등으로 시작하는 고백이었다. 그 고백은 정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하나님을 읊었다. 그렇게 고백되는 하나님은 정말 위대하시고 이 세상의 주인 되시는 분이셨다.
그런데 이렇게 고백 되어지는 하나님 이후의 기도는 지극히 세밀한 간구였다. 우리 교회 잘 되게 해 주시고, 성가대 복주시고, 목사님 설교 잘하게 해 주시고, 주일학교 아이들 잘 자라게 해 주시는 등 생각해 보면 이러한 기도는 상당히 모순되어 있다.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주시고, 역사의 주인이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신데 우리는 간구하기를 그런 하나님이 우리 교회 구성원에게 복주시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고, 그의 자녀라면 이런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으로서 그 역사를 내가 나서서 이루어 가겠다고 해야 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고백과 간구는 일치되지 않고 모순되어 있다.
기도가 이렇게 되니 우리는 행함도 없다. 정말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역사를 움직여 갈 수 있는 일을 행해야 함이 당연한데, 우리는 그러한 행함을 꿈꾸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세상’ 것인 양 하고,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듯이 여긴다.
한국교회의 또 다른 모순이 있다. 역사에 대한 기억과 현실이 다르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교회의 가장 놀라운 일은 3.1 만세운동이다.
1919년 한국교회는 전 국민의 2%도 안 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민족대표 33인 중에 기독교인이 16명이었다.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을 보면 교회가 섰던 곳이다. 제암리교회에서는 일제에 의해 교인들이 교회당에서 불에 타죽는 일까지 있었다. 이러한 일을 통해 3.1 만세운동은 한국교회가 조선의 역사를 뒤바꾼 놀라운 일로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지역에서는 3.1절 기념예배를 드렸다. 지금도 지역마다 연합으로 기념예배를 드리는 곳도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감격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역사를 움직여 가는 위대한 모습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교회는 결코 성장한 교회, 부흥한 교회가 아니었다. 시대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고,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함께 했던 교회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러한 교회가 되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여, 부자 되는 교회가 되고자 한다.
요즘 교회들이 어려움을 호소한다. 코로나 기간 동안 숫자는 줄었어도 헌금은 유지가 되었는데, 이제 교인 감소와 경기 침체 등이 겹치면서 헌금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더군다나 금리가 오르면서 부채가 있는 교회들은 어려움이 더욱 커지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교회들은 긴축재정으로 돌아섰다. 줄어든 헌금에 맞추어 지출을 줄여간다. 요즘 후원을 요청하면 선뜻 나서는 교회가 없다. 모두가 어렵다며 재정지출을 줄이고 있다는 답변이 대부분이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재정감축은 우리의 신앙고백이라는 것이다. 기존에 지출되는 재정에서 우선순위에 따라 깎아나가는 과정이다. 그 우선순위라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고백의 순서이다. 교회 유지비, 교직원 임금, 구제와 구호, 작은교회 지원, 해외 선교, 사회적 선교 등이 그 순위에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 씩 제하는 과정에서 그 기준은 너무나도 선명이 드러난다. 지출을 늘릴 때는 선한 마음이지만, 줄여나가는 것은 이러한 신앙 결단 앞에 서게 한다.
우리가 역사의 주인이시며, 그 나라를 이루어 가는 하나님을 고백한다면,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고백이 우리의 기도와 행함으로, 그리고 우리의 재정으로 드러나야 한다. 신앙은 풍요로움이 아니라 어려운 그 때에 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