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명령을 내리시는 예수님
저쪽에서 죽음의 행렬이 다가 옵니다. 통곡과 좌절의 슬픈 인생들이 지나갑니다.
예수께서 ‘몸부림치며 우는 여인’을 보십니다. 불쌍히 여기시며 일면식도 없는 여인에게 ‘울지말라’ 하십니다. 그런데 울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여인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한 슬픔과 절망이 있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아무도 예수님께 나아와 무엇을 요청하거나 간구하지 않는 가운데 벌어지는 일입니다. 특별한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인해 일어난 기특한(?)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믿음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닙니다.
나인성에 가신 예수님, 우연한 만남인 것 같고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습’인 것 같지만 예수님은 뜻이 있고 계획이 있어 그때 거기에 계신 것입니다. 죽음 앞에 절망하는 인생들에게 ‘당신이 누구신지, 죽음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싶어하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슬픔과 고통, 절망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는 분입니다.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신 예수님께서 아무도 손댈 수 없는 죽음에 손을 대십니다. 주님의 손대심으로 인해 새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렇게 인간의 절망과 한계, 죽음에 손을 대시고 죽음에 대해 명령을 내리십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언제나 생명의 말씀, 창조의 말씀, 치유, 회복의 말씀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절망과 비극의 여인에게 새 생명과 기쁨을 주십니다. 죽음의 행렬이 감사, 찬송의 행렬이 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알게 하십니다.
죽음과 절망을 다루시는 부활의 주님, 새 생명과 기쁨을 주시는 주님은 우리가 ‘불행, 비극, 저주, 한계’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 손을 대시며, 만유 가운데 계시고 만유를 다스리시고 만유의 주인 되심을 보여주십니다. 죽음, 절망, 좌절, 불행, 어둠, 음부의 권세가 예수의 권세 가운데 무릎을 꿇습니다.
죄와 죽음, 저주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계시기에 그 예수님 때문에, 그 예수님과 함께 내 삶의 자리에서 우리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로 인해, 그분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라는 사실로 인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도 부활하게 됩니다.
오늘 가장 큰 절망과 불행에 빠져 있던 여인이 예수를 만남으로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예배자가 됩니다. 죽음을 막아선 예수로 인해 장송곡이 변하여 기쁨의 노래가 됩니다.
나인성에 찾아오신 주님, 우리를 찾아오시고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를 성전 삼아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또 다른 ‘나인성의 기쁨과 노래’가 우리 가운데 계속되기를 원하십니다. 여기 오늘도 우리의 통곡과 절망 가운데 주님이 다가오십니다. 불쌍히 여기시며 울지말라 하십니다. 그 절망과 죽음에 손을 대십니다. 죽음에 대해 명령을 내리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