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들여다 보는 ‘성경공부’ 말씀을 직접 경험하는 ‘묵상’
성경적 설교를 하기 위해서 본문으로부터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설교자의 고민은 어떻게 말씀을 들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힌트는 예수의 말씀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누가복음 10장에 예수께서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하고 묻는 율법교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 이 질문은 사실 두 가지 성경 읽기 방식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는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무엇인지를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을 독자의 삶의 지평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육화하여 읽느냐하는 것이다.
율법교사와 마찬가지로 대다수 목회자들에게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읽는 방식은 낯설지 않은 일일 것이다. 다년간의 신학교육을 받은 목회자들은 헬라어와 히브리어 등 원어를 통해 성경을 읽으며 본문의 문자적 의미를 문법적 방법을 동원하여 읽을 수 있게 된다. 또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문학적 맥락 속에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도 구비하게 된다. 적어도 성실하게 신학교육을 받은 이들은 대부분의 본문들에 대해 이러한 방법을 통해 무엇이라 기록되었는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문제는 본문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는지 아는 것이 본문으로부터 말씀을 듣는 것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율법교사는 누구보다 정확하게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율법으로부터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문자적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생에 이르는 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삶의 지평에서 성경을 읽고 살아있는 말씀으로 육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곧 그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대한 지식(knowledge about the word)은 있었을지 몰라도 말씀을 아는 지식(knowledge of the word)은 없었던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에 관한 지식만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박물관 안에 있는 사자처럼 아는 사람이다. 사자의 크기가 얼마이고, 몸무게가 얼마이고, 치악력이 얼마인지는 알지만 한번도 사자의 포효를 들어본 적도 없고 그 위풍당당한 기세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사자를 책으로만 공부한 사람과 사자에게 쫓겨본 사람이 전하는 사자에 관한 이야기는 다를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공부만 하고 경험해보지 못한 설교자, 말씀을 체화시키지 못한 설교자는 성경을 능력있게 설교할 수 없다. 말씀을 경험하고 체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읽기 방법이 묵상이다. 성경에 기록된 것을 잘 파악하기 위해 성경 연구도 하고 공부도 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 관해서 많이 안다고 해서 성경을 잘 설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살아서 운동력있는 말씀을 겪어본 경험이 있어야 성경적인 설교를 제대로 할 수 있다. 성경이 말씀하는 메시지와 부딪히고, 씨름하고, 몸부림치고, 결국은 그것을 삼켜 말씀이 삶이 되도록 육화시킨 설교자가 성경적인 설교를 하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묵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묵상은 단순히 QT 교재의 한 부분을 이해하고 나눔을 위해 그럴듯한 말을 적어내는 것이 아니다. 죄악된 인간의 본성과 마주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며,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거울로 보는 일이며, 그렇게 죄악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자신과 세상을 끌어 안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일이다. 성경 공부가 본문 밖에서 말씀을 들여다 보는 것이라면, 묵상은 본문 속으로 들어가 말씀을 경험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본문으로부터 말씀을 듣는 방식은 성경 연구와 말씀 묵상, 이 두 가지 읽기 방식 모두를 포함한다. 어거스틴이 그러했듯이 설교자여 들어 읽으라(Tolle lege). 성경을 들어서 읽고, 마음을 들어서 읽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