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직 목사의 회심과 성결 체험 ①

2024-05-08     허 명 섭 목 사 시흥제일교회 · 교회사 박사

성결은 하나님의 명령이자 뜻이다. 신자가 성결하게 되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결은 불가능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명령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결의 은혜를 사모하고 그 은혜 안에 거해야 한다.

성결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성결을 아는 것은 아니다. ‘성결에 대해 아는 것과 성결을 아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성경이나 신학 혹은 교리 학습 등을 통해 성결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성결을 아는 것은 아니다. 물론 성결에 대해 아는 것은 성결을 아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다. 성결에 대해 알지 못하면, 성결에 대해 관심을 갖고나 성결을 알고자 열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결에 대해 아는 것만으도 다른 사람에게 성결을 가르칠 수 있다. 하지만 성결을 알지 못하면 참된 성결의 은혜를 누릴 수 없다. 성결교회의 사부(師父)로 불리는 이명직 목사의 성결 체험은 이 복음을 여실히 일깨워준다.

이명직은 황성기독청년회(YMCA) 학관에서 공부한 것을 계기로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다. 15세 때 그는 승려가 되어 도를 닦으며 아름다운 팔도강산을 유람하며 살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새벽과 저녁으로 들려오는 그윽한 종소리가 늘 그의 기억을 새롭게 해 주었고, 삭발하고 회색의 승복을 입고 손에 염주를 들고 수풀 사이를 배회하는 승려의 한가하고 조용해 보이는 모습이 인생의 신비감을 더해 주었기 때문이다.(“은혜기.” [활천] 1924. 9.)

하지만 이런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학관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원래 선교사들은 조선사회의 하층민을 대상으로 선교하였지만, 그 와중에 일부 젊고 똑똑한 상류층 사람들도 선교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은 주로 양반의 자제였기에 낮은 계층이 다니는 교회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선교사들은 양반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하는 모임을 서둘렀고, 이렇게 생겨난 곳이 YMCA이다.

YMCA는 1903년 10월 28일 “교육, 계몽, 선교”를 목적으로 창립되었다. “진정한 개혁은 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 그러므로 한국의 애국자는 개혁자라기보다 계몽자라야 한다”는 논리였다. 여기에 1989년 독립협회사건으로 감옥에 갔다가 러일전쟁 이후에 석방된 민족운동가들이 대거 가담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승만, 이상재, 김정식, 유성준 등이었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황성기독청년회에서 활동하였다.

이들 중에서도 이후 월남 이상재는 황성기독교청년회와 각별한 관계를 이루었다. 이상재는 개화파 인물로서 미국과 일본을 다녀왔지만 기독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수감생활 중 ‘위대한 임금’이 보낸 사자와 마주하는 신비스러운 종교체험을 하게 되고, 이후 철저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허명섭, [일제에 항거한 그리스도인들], 36-37). 출옥 후 그는 연동교회에서 게일(James S. Gale)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황성기독교청년회에 가담했고, 교육위원장을 거쳐 1908년에는 종교부 총무가 되었다. 그가 인도하는 성경공부는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이 무렵에 기독교청년학관에서 공부를 했던 이명직 목사가 이상재로부터 기독교를 배웠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명직은 당시의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이 학관은 기독교계통의 학원으로 교과과정에서 특별히 성경을 가르치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자연스럽게 매일 복음의 강화를 듣게 되었으며, 복음의 강화를 듣던 중 예수님을 믿을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집안이 완고했기 때문에 자유롭게 믿지는 못했으며, 단지 마음으로만 신앙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에 불교에 귀의하고자 했던 것이나 예수를 신앙하고자 결심했던 것으로 보아, 종교심이 다른 사람보다 강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깊이 깨달았다. 그뿐 아니라 인간의 종교심이란 인간의 고유한 본성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