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1402) 반듯한 사람

2024-04-17     구금섭 목사 (경인지방 ․ 큰나무교회)

집단적 교만은 개인을 지배하는 권위가 있고, 개인은 집단의 주장에 굴복하게 되므로, 집단적 행위와 개인적 태도는 구분해야 한다.

집단적 교만과 이기심은 개인보다 오만과 위선과 무자비함이 더 강하다. 민족국가에서 대표적으로 표현되는것처럼, 죄의 뿌리인 교만과 맹목적 숭배는 정치 단체가 결속 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국가는 개인은 할 수 없는 큰 의미를 부여하는 주장을 함으로써, 개인들로 부터 타당성을 인정받고 하나님처럼 행세한다. 이러한 집단 이기주의 속에 개인은 상실 되거나 혹은 개인의 세력을 강화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법을 힘의 논리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물이 흐르듯 해야 한다. 만약 집단의 힘으로 물길을 막고 서면 저수지가 무너지듯이 재앙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예언자적 종교는 국가의 자기 신격화와 대립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하나라고 주장하는 죄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독점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는 죄에 대해 심판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심판은 교만의 죄를 범한 모든 나라에 임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멸망의 원인이 세속 도시의 교만이라고 주장했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역사적 기독교와 동일시 함으로써, 교황을 영적 황제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국가나 교회는 집단적 이기주의의 도구가 될 수 있으며, 어떤 공동체도 교만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공동체도 예언자적 심판의 선포를 민감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모든 사람과 나라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한다.

라인홀드 니버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사회라는 저서를 남겼다.

2024년 4월도 잔인한 달이 되었다. 도덕적 인간이 있을까만은 제 22대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 개표결과를 보고 하루종일 맨붕상태였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허공을 걷는듯 머리가 흔들리니 시야가 확연치 않았다. 비도덕적인 후보들은 국민의 선택을 받지 못할것이라고 내심 믿었는데 기대가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나라 국민의 도덕적 온도계가 고장이 났다고 생각하니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비도덕적 인간이 비도덕적 사회를 낳는구나 생각하니 이 사회에 대한 희망마저 무너지는 날이었다.

일반 국민이 죄를 지으면 얼마나 아니 무슨 재주로 버틸수 있을까? 대번에 감옥에 갇히고 말것이다.

그래서 권력을 쥐려고 야단법석을 떠는구나 생각이 드니 유권무죄 무권유죄가 아닌가 싶다.

조선시대에는 죄를 짓고 소도로 도망을 갔다 비유가 될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죄를 짓고 감옥에 안가려고 여의도로 가려고 발버둥을 치고 안달복달하는게 아닐까?

이 사회에 쓸모있는 사람이 되라는 부모님의 기대로 교육을 받도록 어깨가 부서지도록 일해서 뒷받침했을텐데, 우리 교육은 무엇을 가르쳐왔을까!

힘의 논리로 자기를 방어한다면 법위에 정치가 군림하여 상식마저 무너뜨린다 생각하니 물이 흐르듯 순리대로 가는 것이 법이 아니라 법도 힘이 없는 곳은 순조로이 흘러 갈 수 있지만 힘 앞에서는 법이 법 노릇을 못한다 생각된다.

무법천지 세상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보여주고 법을 지키라면 그 누가 공감할수 있을까!

사실 도덕의식이 문들어져 암병처럼 양심을 파먹어버린 국민이 실망이고 미워진다.
역사의 맷돌은 천천히 돌아간다고 했나 ?  이젠 하늘만 바라볼 뿐이다. 

공공선인 사회적 가치, 도덕적 가치, 윤리적 가치가 무너져 버린 우리 사회 이젠 비도덕이 출장가고 도덕이 문지기가 된 한심한 국가가 되어버렸다. 아노미현상이 봄 안개처럼 한반도에 걸쳐 앞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반듯한 사람을 지도자로 세운 세상을 볼 수 있을까?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라고 안중근 의사는 말했다. 곧 "이익을 보거든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먼저 생각하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라"고 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수많은 소년과 학도들이 나라를 위험에서 구하려고 자원입대했다. 견위수명(見危授命)한 소년병들과 학도병들이 강토를 지키고 이슬처럼 사라졌다. 이런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사회 정의가 무너지고 혼란하면 결국 그 나라는 망하게 된다. 상식과 도덕이 무너지면 스스로 붕괴되고 만다.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정치 지도자는 국민에게 버림 받는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바렌츠 선장" 이야기가 있다. 이들의 정신이 네델란드를 부강하게 한 민족정신이다. 네델란드는 강대국 사이에 끼여 14세기엔 프랑스의 지배 하에 있었고, 15세기엔 오스트리아 함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았고, 16세기엔 스페인의 치하에서 핍박과 설음을 받았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개신교도가 주류가 되면서 패권국가로 발돋음하면서 "신용"을 생명시 하는 국민의식으로 나라가 부강해졌다. 그때 "빌렘 바렌츠"(Barentsz) 선장은 1596년 북극해의 "노바야잼" 섬을 경유해서 북동항로 개척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다. 

영하4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의 추위에 8개월을 버티다가 선원 18명 중 8명이 숨졌다. 그들은 굶주리면서도 "고객의 화물"을 건드리지 않았다. 빙하가 풀리면서 1597년 6월 13일 구출되고, 고객의 화물을 돌려주었다.

이처럼 네델란드의 성공요인은 "신뢰"였다. 바렌츠 선장의 목숨을 건 "신뢰" 로 무역망이 모든 나라에까지 상권형성을 이룩했다. 당시 네델란드의 대형 범선 2만 척으로, 유럽의 80%를 차지할 정도였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확신(belief)하는 것이요, 신뢰(faith)하는 것이며, 진실(trust)한 것이며, 충성(Faithful)스러운 것이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가 '장폴 사르트르'는 "실존(Existence)은 본질(Essential)에 우선한다"고 했다. 

최고 본질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수평적 삶도 윤리와 도덕과 상식이 있는 나라가 되야 한다. 이것이 자유민주의의가 성장한 시민사회이다. 앞으로 나라 장안이 얼마나 소란스러울것인가 짐작이 가서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