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1401) “장애인도 하나님 형상대로 만드셨대요”

2024-04-10     박명우 목사 (인천중앙지방 ․ 서머나교회)

모든 사람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삶은 무엇일까? 바로, 고난이 없는 삶일 것이다. 그와 반대로, 모든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삶의 모습은 무엇일까? 바로, 연약함을 가지고 사는 삶일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삶 즉, 고난과 연약함이란 두 바퀴를 가지고 인생의 수레를 끄는 사람이 있다. 바로, 장애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평생 고난과 연약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장애인들이 불행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도 그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며 자신의 삶에서 밀어내며 살려 한다.  

스위스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카를 융(Carl Jung)은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장애인은 비장애인에게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그림자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심리적인 거부감을 느낀다”고 말이다.

이러한 거부감을 해소하고자 우리나라에서는 1981년 4월 20일을 국민의 장애인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고 장애인의 재활 의욕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 하에 장애인의 날로 제정했다. 그날은 올해로 43년을 맞는다. 이에 발맞추어 우리 교단도 부활주일 다음주일을 장애인주일로 정하고 지켜오고 있다. 

그러나 장애인의 날이 언제인지? 어떤 목적으로 제정되었는지? 장애인 주일이 언제인지? 장애인 주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있는 국민과 교회, 성도는 얼마나 될까? 아니, 장애인 당사자들에게 있어 이 날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분명, 장애는 고난과 연약함의 표징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장애가 한 분석심리학자의 말처럼 어두운 면만을 보여주는 그림자 역할만 하는 것일까? 그 장애가 그저 불행으로만 귀결되어 밀어내고 싶은 상대적 고난일 뿐일까?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조개 안에 진주가 있듯, 장애 안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예언적 순기능이 내포되어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실로암 못에서 날 때부터 보지 못한 시각장애인을 고치신다. 이 사건은 단지 육의 눈을 뜨게 한 기적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는 영혼들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한 사건이다. 즉, 그의 장애는 죄로 연결시킨 제자들의 고백을 담은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본다고 말하는 바리새인들의 보는 것을 담은 것도 아닌, 오직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는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서의 사명을 담은 것이다.

또한 장애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는 진리의 순기능이 내포되어 있다. 

발달장애인과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사역했던 때가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무엇인가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며 사역했는데, 결국 그들이 나에게 너무도 큰 진리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것은 바로, ‘소통’이다. 

발달장애인들은 인지기능이 약하여 분명 함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통하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 바로 그 모습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분명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과 함께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과 얼마나 소통을 하고 있는가?’ ‘우리 공동체는 분명 한 공간에 함께하고 있는데, 정작 서로 얼마나 사랑하며 마음의 소통을 하고 있는가?’ 바로 그때 한 사역자의, 한 공동체의 영적 장애를 깨우쳐 준 도구가 바로 그들이었다. 

어린이 찬양율동곡의 가사가 머리를 스친다.

‘모두 다 하나님 형상대로 하나님 형상대로 하나님 형상대로 만드셨어요.

아빠도 하나님 형상대로 하나님 형상대로 하나님 형상대로 만드셨어요.’

교회는 이제 그 찬양에 한 절을 더 추가하여 찬양해야 한다.

장애인도 하나님 형상대로 하나님 형상대로 하나님 형상대로 만드셨어요.

어느 날 장애 학생에게 물었다.

“넌 어떤 세상이 오길 바라니?”

“목사님! 저는 저의 있는 모습 그대로 봐주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 학생에게 이미 너를 그렇게 보고 있는 분이 계심을, 그리고 그분의 시선을 직접 보여주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다. 교회는 반드시 실로암 못에 비친, 씻은 장애인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