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성결인 정근모 장로(삼성제일교회 원로)
한국형 원자력 시대 연 위대한 크리스천 과학자
인류 에너지 사업의 새 전기를 마련한 ‘원자력’ 발전의 중심에서 한국을 넘어 세계가 주목하는 천재 과학자로 존경을 받아 온 정근모 장로(삼성제일교회)가 최근 교단이 선정한 ‘자랑스러운 성결인’에 오르며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고 있다. 과학자로서의 성공만큼이나, 신앙과 봉사에도 열정적이었던 정 장로는 진정 우리 성결인의 귀감이자 자랑이 되고 있다.
정근모 장로의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그야말로 ‘천재’라는 수식어가 부족할 정도였다. 경기중학교 시절 전국 수석을 시작으로 고교 과정은 불과 4개월 만에 이수했으며, 서울대 물리학과 차석, 서울대 행정대학원 수석을 차지했다. 이후 미국으로 떠난 정 장로는 미국 미시간주립대를 또다시 수석으로 합격 후, 석사과정 없이 6개월 만에 박사과정을 통과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불과 24살에 플로리다대 최연소 조교수에 오른 정 장로는 곧바로 최고 권위의 ‘한림원’ 회원에 발탁되며,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다. 세계 과학계의 떠오르는 젊은 천재로 프린스턴대 핵융합연구소 연구원, MIT공대 핵공학과 연구교수, 미국 뉴욕공대 교수를 역임하며, 승승장구하던 정 장로는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국내 과학계 발전과 후임 양성에 힘을 쏟기로 한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과학은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이 주도하던 세계 과학계의 변방으로, 그 수준이 한참 뒤떨어졌던 상황, 그는 세계가 원했던 자신의 재능을 고민 없이 고국의 발전을 위해 쏟기로 한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KAIST 부원장, 한국전력기술(주)사장, 과학기술처 장관(12대,15대), 호서대와 명지대 총장을 거쳐 국제원자력기구 의장, 세계원자력 한림원 원장, 한국과학기술 한림원 원장 등을 잇달아 역임하며, 한국 과학 발전의 새 기원을 마련한다.
그의 헌신적 기여로 한국은 세계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뿐 아니라, 이제는 특정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력을 자랑하며, 오히려 세계 과학계를 선도해 나가고 있다. 정근모라는 한 사람의 존재가 국내 과학계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멈춤 없는 도전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90년대 중반 전 세계를 깜짝 놀래켰던 원자력발전소 건립은 모두가 반대했던 도박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이 집약된 원자력발전소는 그야말로 선진국의 상징과도 같은 것으로, 개발도상국에도 미치지 못한 한국은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 ‘한국형 원자력발전소’의 건립을 외치는 정 장로를 향한 세계 과학계의 비웃음은 당연했고, 국내 학자들 역시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정 장로는 1982년 처음 ‘한국형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제의한 이후, 단 10여년만인 1995년 이를 완성시켰다. 이때 완성된 결과물이 100만킬로와트급 원자력발전소로, 설계로 보나 가동률를 보나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그리고 14년이 지난 2009년, 한국은 세계 원자력 최강국이라는 프랑스, 일본 등의 회사를 제치고, 아랍에미레이트(UAE)의 원전 건설을 수주하게 된다. 당시 수주 금액은 단일 계약으로는 사상 최대규모였던 47조원, 한국 과학계의 달라진 위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모두가 “안된다”고 만류할 때, 그가 “할 수 있다”고 외칠 수 있던 바탕에는 독실한 신앙이 자리한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들여다보며,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한국이 크게 쓰일 것을 확신했고, 원전 역시 그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결정에 확신을 가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사실 과학과 종교의 상존이 그리 자연스러울 수는 없다. 인류의 발전과 노력의 결과물로 추앙받는 과학에 있어 종교는 어디까지나 ‘비과학’의 영역, 더구나 세계 최고의 과학자로 존경받던 정 장로가 정작 자신의 결정에 신앙을 우선한다는 것을 주변에서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의 저서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쳔이고 싶다’를 속에는 과학자로서 신앙을 지키고자 노력한 그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미국에 있는 아들이 신부전증으로 다시 입원했다는 소식에 기도부터 하는 그를 보며, 주변에서는 “과학자가 그것도 최첨단 과학인 원자력을 연구한다는 사람이 아들의 입원소식을 듣고서 한다는게 고작 성경 읽고 기도하는 일이냐”라고 의아해 한다.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 정 장로는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 과학적 한계에 따른 깨달음을 고백하며, “과학자는 그 어떤 사람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세계가 존경하는 최고의 과학자가 하나님 앞에 그저 하나의 피조물로 겸손히 무릎 꿇은 이유다. 그런 그의 깨달음은 아는데 그치지 않고, 곧바로 행함으로 이어졌다. 지난 1994년 한국 해비타트를 직접 창립하고, 30년 가까이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 2015년 이사장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평회원으로 여전히 집짓기에 열중하고 있으며, 통일 후에는 북한에 해비타트 운동을 벌일 꿈을 갖고 있다.
1997년부터는 제4대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이사장으로 생명나눔 운동에 헌신하며, 국내 장기기증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이 뿐 아니라, 2000년대 한국교회의 청소년 부흥 운동을 이끌었던 ‘라이즈업 코리아’의 이사장까지 맡아, 교계 부흥 발전에도 족적을 남겼다.
또한 정 장로가 1986년 미국 Cedar Group에서 예배 중 받은 소명으로 시작한 민족화합기도회는 올해로 34회 째를 맞으며, 한국교회의 대표 3.1절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해당 기도회는 1988년 3월 1일 종로성결교회(현 삼성제일교회)에서 첫 기도회를 가진 이래, 해마다 교계 주요 단체들이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다.
1939년 12월 30일 서울에서 출생한 정근모 장로는 서울대 물리학과에 진학한 이후, 서울대 행정대학원과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과학기술정책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미국 남플로리다대학교 조교수, 뉴욕공과대 부교수, 프린스턴대학교 핵융합연구소, MIT대학교 핵공학과 등에서 연구교수로 활동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한국과학원 부원장, 한국전력 사장, 국제원자력기구안전자문위원,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국제원자력기구 이사 및 총회 의장, 12대 및 15대 과학기술처 장관, 고등기술연구원장, 대한민국 원자력 대사, 국제원자력한림원 회장, 한국 해비타트 이사장,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명지대 총장, 호서대 총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수상 내역으로는 한국과학원 설립 공로패, 대한전기학회 업적상, 미국과학재단 업적상, 미국과학재단 특별공로상, 대한전기학회 공로상, 대한민국 은탑산업훈장, 대한민국 청조근정훈장, 캐나다원자력협회 국제공로상, 국제원자력한림원 공로상, 장영실과학문화대상, 한국에너지공학회 늘푸른에너지 공학상, 제4회 한국기독교학술상 등이 있다.
또한 과학기술-미래를 개척하는 열쇠(1989), 미래를 개척하는 길(1990),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싶다 (2001), 일어나라 대한민국 (2007), 소명 앞에 무릎 꿇은 신실한 크리스천들(2013) 등의 책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