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묵상) 따스한 부활의 봄바람
봄맞이 교회 대청소를 하고 난 다음날, 봄바람이 몹시 불어댔습니다. 교회 주변을 살피던 차에 전날 버리지 않았던 쓰레기가 사방에 나뒹굴고 도랑에까지 떨어진 것을 보게 되어 급하게 쓰레기를 모아 담았습니다.
며칠 후 몇몇 분들과 함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모아 둔 쓰레기가 안 보인다는 말이 나오자 제가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바람이 많이 불어 깊은 도랑에 쓰레기가 떨어지는 바람에 내려가서 줍느라 애먹었어요.”
그러자 어느 분이 “목사님 죄송해요, 제가 그날 버렸어야 했는데 깜빡하고 쌓아놓고 그냥 갔네요”라고 하길래 혹시라도 마음 쓰실까봐 “괜찮아요, 봄바람이 심술을 부린거죠. 왜 그렇게 봄바람이 거센지 모르겠어요”하며 농으로 넘기려 했습니다.
그런데 농사를 짓는 그분은 “그래도 농부들은 봄바람은 꼭 세차게 불어야 한다고 해요.”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궁금해서 물었더니 “봄바람이 쎄게 불어야 들판에 잠들어 있던 풀들이 깨어난답니다.” 하십니다.
가만 보니 봄바람이 거칠긴 하지만 봄바람이 불고 나면 들판에 올망졸망 싹들이 돋아나고 들꽃들도 빼꼼히 얼굴을 내밉니다.
낙엽이나 덤불에 덮여 있던 풀들이 바람이 불면서 따스한 숨을 만나 잠을 깨고, 따스한 볕을 쬐며 기지개를 켜나 봅니다. 인생도 거센 바람을 만납니다.
고난의 바람은 거칠게 싸고 돌아 인생을 넘어지게 하고, 시련의 바람은 인생을 누르고 힘 못쓰게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바람을 타고 자신의 둥지를 박차고 일어서기도 합니다.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보금자리에서 꺼내 높은 데서 떨어뜨리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가만히 있지 말고 날개 짓을 해서 창공으로 날아오르라는 뜻입니다. 날개를 활짝 펴 바람을 타며 중심을 잡는 법을 느끼고 배우라고 합니다.
인생은 본능적으로 둥지에 머무르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바람을 불게 하시어 그 둥지를 흩어버리시고, 보금자리에서 떨어뜨립니다. 비로소 성도는 실패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의지하는 담대함을 가집니다.
고난은 오히려 성도의 묶인 것을 풀어줍니다. 고난 속에서 성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을 얻습니다. 주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겨울과 같은 시련과 고난의 바람은 구주를 감싸 휘돌았습니다.
거친 채찍은 예수님의 육신을 휘감았고, 군중들의 저주의 소리, 혐오의 시선은 주님의 영혼을 짓눌렀습니다. 그러나 구주는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을 이루시고 모든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그 거친 바람을 다 맞으셨습니다.
마침내 주 예수께서는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두려움과 의심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 한 가운데 오셔서 평강을 주셨습니다. 고난의 흔적인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숨을 “후~” 불어 내쉬며 이르시기를 “성령을 받으라”(요 20, 22)고 하셨습니다.
거센 고난의 바람을 이겨내신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전혀 다른 바람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따스한 성령의 바람을 불어넣으시어 제자들을 새롭게 하시고, 그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일으켜 세우시고, 누구의 죄든지 사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시어 파송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흩으시고 열방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도 성령께서는 때로는 사도들에게 임한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때로는 엘리야에게 임한 부드럽고 세밀한 바람으로 주님의 몸인 교회에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성령의 전으로 부름을 받은 성도와 교회는 이 세상에 따스한 숨을 불어넣어 지친 영혼이 주님을 만나 새 생명을 얻게 할 사명을 지닙니다.
복음을 힘차게 전하여 잠든 영혼을 깨우는 바람,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은 심령을 녹이는 따스한 봄바람이 됩시다.
어려운 이웃을 위한 희생과 섬김과 봉사를 기쁘게 감당합시다. 날개를 활짝 피고 부활의 증인이 되어 부활의 바람, 성결의 바람, 성령의 봄바람을 불게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