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장애인 주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 , 장애인들의 친구 

2021-04-07     손동식 박사(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

런던에서 학업할 때, 우리 가족은 지역에 위치한 영국 엠마뉴엘 교회(Emmanuel Church)를 출석했다.

유학 기간 동안 교회에서 들었던 수많은 설교들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교회 강대상을 떠올리면 항상 기억 한 켠에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그것은 강대상으로 올라가는 길 한쪽에 마련된 비스듬하고 평평하게 만들어진 턱없는 길이다.

그것은 예배시간에 연단에 오르는 휠체어를 탄 ‘한 교우’를 위한 것이었다. 이상하게 교회를 떠올릴 때면 강단 한쪽 켠에 있던 그 작은 오르막이 생각난다.

그것은 내게 교회가 무엇인지 말해주는 설교와 같았다. 약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도 편견없이 ‘형제, 자매’라 부르는 세상의 유일한 소망된 공동체 말이다.

바울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라는 선언을 통해 참된 교회의 표지가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바울의 선언은 부자나 빈자, 강자나 약자, 장애인이나 비장애인 역시 주님의 교회의 일원이며, 본질적으로 차별이 없음을 내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약한 자, 특히 육체적으로 약한 장애인들에 관해 설교단의 입장은 참된 교회를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설교단은 항해 중인 교회의 뱃머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복음서의 많은 내용이 예수의 치유사역이라 할 때에 설교자들은 이 질문을 비껴갈 수 없다.

그렇다면 강단은 장애인에 관해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 장애에 관한 통전적 신학을 가지라 먼저, 장애나 질병의 치유와 관련된 본문을 다룰 때크게 두 가지 신학적인 고려가 필요하다.

첫째는 장애의 원인에 관한 것이다. 장애인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인가? 아니면 저주를 받은 자인가? 왜 그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러한 질문에 관해 설교자가 어떤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교인들의 의식과 사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질병이 죄와 밀접하게 관련있으며, 하나님의 치유를 간구하는 환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함을 말한다.(신 28:20~35, 약 5:16)

유대인들은 대개 질병을 죄에 대한 형벌로 간주했으며, 예수의 치유 사역에서 병자의 믿음은 종종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었다.(막 10:52; 눅 8:48; 18:42)

그러나 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실 때 선행조건으로 항상 믿음을 요구하신 것은 아니다.(요 5:1~9)

또한 장애의 이유에 관해 욥기와 요한복음 9장은 본인이나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장애의 원인을 장애인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나 본인의 믿음 부족 때문이라는 암시를 주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둘째로, 병자 치유의 의미이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현세적이며 기적과 축복 지향적인 관심만을 고수하는 당시의 이방종교의 치유 개념과 전혀 다른 통전적 치유(wholistic healing) 사역임을 드러내야 한다.

예수의 치유사역은 그가 누구신지를 종국적으로 드러내며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함의한다.

또한 그분의 치유사역은 육체적 치료를 넘어 소외된 병자의 공동체의 복귀를 통한 사회적 회복과 종국적으로 죄사함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영적 차원의 것임을 함께 다뤄야만 한다.

변함없이 당신은 빛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시다. 그 분은 능히 병자를 고치시고 약한 자를 일으키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신비와 섭리 속에 신자의 약함을 통해서도 일하시는 분이시다.

만약 설교자의 설교가 필연적인 치료에만 집중되어 있다면 그 의도는 선할지라도 오랫동안 불치병을 앓고 있는 신자와 가족들에게 부담과 죄책감을 줄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장애를 가진 그들의 처지가 무언가 죄악되거나 불운한 상태라는 암시를 교우들에게 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장애가 죄악되거나 불운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성경은 즉각적인 치유를 경험하지 못한 신실한 종들, 바울(고후 12:7), 에바브로디도(빌 2:25), 디모데(딤전 5:23), 드로비모(딤후 4:2)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특히 바울은 세 번이나 주께 간구했지만 자신이 자고하지 않도록 육체의 가시를 제거하지 않은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자신의 약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뭄을 온전히 기뻐했다.(고후 12:7~10)

또한 우리는 뇌성마비 장애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송명희, 전신화상을 딛고 일어선 이지선, 그리고 팔다리가 없이 태어났지만 닉 부이치치(N. Vujicic)의 약함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감동과 도전을 받는다.

하나님은 질병과 고난조차도 그 분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한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분이시다.(욥 42:1~6; 고후 12:1~10)

따라서 장애인 교우로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격려해야 한다. 그들은 변함없이 빛나는 존재이다.  

환대와 우정의 공동체를 만들라 성경 시대 장애인은 그 질환 자체로 인해 육체적으로 고통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겪은 더 심각한 고통은 공동체로부터의 단절과 사회적 배척이었다. 이러한 단절과 배척은 당시에 일상적인 관습이었지만 우리 주님은 종종 이러한 경계를 뛰어 넘으셨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불쌍한 나병환자를 고치시기 위해 그를 만지심으로 나병 들린 사람과 접촉하면 부정하게 된다는 정결규례를 파기하셨다.(눅 5:13)

또한 접촉하는 모든 것은 부정해지기 때문에, “부정하다” 소리치며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혈루증 여인이 예수의 겉옷을 만졌을 때, 주님은 가는 길을 멈추고 그녀를 고치시고 “딸”이라 부르며 받아주셨다.(눅 8:48) 또한 소경 바디메오가 길에서 소리높여 예수를 부를 때 군중들은 바디메오를 윽박지르며 쫓아버리려 했지만(눅 18:39) 예수께서는 가는 길을 멈추고 그를 고치셨다.

무엇보다 주님은 큰 잔치 비유를 통하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그분의 종말론적 잔치의 참여자로 초청하셨다.(눅 14:21)

주님의 이러한 언행은 당시 사람들이 볼 때에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오해를 무릅쓰고 당시의 문화적, 종교적 관습을 뛰어 넘으셨다.

우리 주님이 그러하셨다면 주님을 주로 고백하는 주님의 교회와 제자들인 우리도 마땅히 그리해야 한다. 여기에서 설교자의 태도와 행동은 교회 공동체에 대단히 중요하다. 교인들은 설교자를 따라할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언어에 주의하라 마지막으로, 설교언어에도 주의가 필요하다. 최근 설교학에서는 비유적, 은유적 표현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비유적 표현이 신체적 언어와 결부되어 강단에서 사용될 때는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눈이 멀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했다”든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되었다”는 표현은 삼가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표현은 공동체의 일원인 장애 교우에게 상처를 남길 수 있으며,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덧씌울 수 있기 때문이다.

2020년, 작년 통계에 따르면 장애유형의 경우, 장애인 10명 중 5명(48.1%)은 지체장애였으며, 청각장애(13.2%), 시각장애(9.8%) 순으로 비중이 높게 나타났다.

따라서, “교만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다”든지 “하나님의 음성에 무관심하고 무지했다”는 표현이 낫다. 소자 한 사람도 실족하지 않도록 강단의 섬세한 주의가 필요하다.(눅 9:42)  

오래전, 선교학자 레슬리 뉴비긴(L. Newbegin)은 “장애인이 없는 교회는 장애교회다”라고 주장했다. 교회에 장애인이 있다는 것은 주님의 교회에 지극히 자연스럽고 마땅한 일이다.

그들로 인해 교회는 더욱 교회다워지며 더욱 온전해진다. 설교자는 장애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하는 동시에, 장애인의 다정한 친구요, 어깨동무하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강단에 임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