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덕 교수의 교회사 속 부활절 이야기

부활절 교회력의 근원

2021-04-07     유재덕 교수(서울신대)
유재덕 교수(서울신대)

부활절은 역사적으로 기독교 축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교회력의 근원이 되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는 부활절에 관한 명시적 합의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부활절 시기나 관련된 의식을 전반적으로 통일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겨났으나 간단하게 처리할 일이 아니었다. 서로 달리 고수하는 부활절을 일정하게 바로잡는 문제는 단순히 날짜나 요일을 결정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경우에 따라서는 각자 처한 지역의 오랜 전통과 함께 바탕에 깔려 있는 공동체의 정서까지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2세기 중반부터 본격화된 부활절 논쟁은 동일한 신앙을 소유한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간단하지 않은 상처를 입히기도 했으나 이후 기독교의 정체성 형성과 교회력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소아시아와 팔레스타인에서는 대체로 요일과 무관하게 니산월 14일 저녁에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의 전승과 관계가 깊었다.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님은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면서 동시에 유월절 ‘준비일’에 십자가에 달리셨다.(니산월 14일, 요 19:31). 유대인들은 유대력 계산법대로 유월절 준비일 저녁에 유월절 양을 먹었다.

유대교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소아시아의 기독교 디아스포라와 팔레스타인의 기독교 공동체 역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니산월 14일에 부활절을 지켰고, 그래서 ‘14일파’(Qu artodecimans)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들은 다음날 아침까지 금식하는 한편 저녁에는 출애굽기의 유월절 이야기를 읽고 예배하다가 새벽닭이 울면 애찬과 성찬식에 참여했다.

이른바 기독교식 유월절을 고수한 소아시아나 팔레스타인 지역과 다르게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략 165년 무렵 일요일에 부활절을 고정해서 기념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달을 기준으로 계산하는 유대력을 좇아서 줄곧 옮겨 다녀야 했던 부활절 요일이 ‘작은 부활절’로 강조하는 일요일, 곧 ‘주님의 날’로 확정된 것이다.

이렇게 교회의 절기와 일상적인 예배 시간이 결합하게 되자 한동안 어머니의 역할을 담당하던 팔레스타인 지역은 모두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와 동시에 로마교회는 새로운 질서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부활절을 지키는 문제 때문에 로마교회와 소아시아교회 간의 골이 점점 깊게 패였다. 사도들과 직접 접촉한 것으로 알려진 폴리카르푸스가 소아시아 지역 그리스도인들을 대신해서 전면에 나섰다.

155년과 166년 사이에 로마를 방문한 폴리카르푸스는 당시 주교 아니체투스와 협상을 벌였다. 둘 사이에서 이렇다 할 합의가 도출되지는 않았으나 성찬식에 기꺼이 자리를 함께 했다. 그런데 나중에 로마교회의 주교직을 승계한 빅토리우스의 생각은 선임자들과 상당히 달랐다.

누군가에게서 ‘14일파’의 부활절 풍습에 관한 내용을 전해 듣고 불쾌해진 빅토리우스는 그들을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소아시아의 기독교 공동체 역시 로마교회의 비판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로마 주교 때문에 자신들의 전통을 포기하려고 들지 않았다. 결국, 빅토리우스는 그것이 해묵은 문제이면서도 오랫동안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왔으니 서로 차이를 인정하는 게 좋겠다는 주변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제대로 꺼지지 않았던 잔불은 325년 오늘날 터키 이즈닉에 해당하는 니케아에서 또다시 살아났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 전체의 통합을 저해하는 부활절 문제를 강력한 정치력을 동원해서 단번에 돌파하려고 했다.

제국이 이미 정치적으로 하나가 된 것처럼 교회들 역시 일괄적으로 통합되어야 마땅하다는 게 공의회에서 대제사장(pontifex maximus) 역할을 수행하는 황제의 확고한 의지였다.

제국 각처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여름 궁전 니케아로 소집된 주교들은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이 전통적으로 고수해온 부활절 날짜 계산 방식과 유대력에 근거한 부활절 풍습을 배격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오래 전에 거부되었던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의 방식을 되살려서 춘분 이후(3월 21일 또는 그 이후의) 첫 보름달 다음에 오는 첫 일요일에 부활절을 지키기로 역시 결정했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 교회들에 보낸 회람 문서를 보면 부활절을 규정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정치신학이 노골적으로 지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앞뒤 맥락을 배제하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겨냥했던 일방적 비난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황제의 회칙은 이랬다.

“그 무엇에 비견할 수 없는 이 거룩한 절기를 축하하면서 유대인들의 풍습을 뒤따르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엄청난 죄악으로 자신들의 손을 더럽히고 있어서 앞을 분간하지 못한 채 고통을 겪고 있다. … 그러니 혐오스런 유대인들과 관계를 끊어버리자.”

콘스탄티누스의 바람과 다르게 니케아 공의회로 부활절에 관한 문제는 완벽하게 종결되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교회를 좇아서 같은 시기에 부활절을 지켰다. 그런데 다른 날짜를 고집하는 이들 역시 여전히 존재해서 지역마다 부분적으로 혼란이 반복되었다.

밀라노에서 주교를 지낸 암브로시우스가 387년에 보낸 서신에 따르면 갈리아에서는 3월 21일, 이탈리아에서는 4월 18일에 각각 주님의 부활을 축하했다.

심지어 아프리카에서는 특별한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4월 25일에 부활을 기념하고 있다고 암브로시우스는 비난했다.   로마교회 중심의 부활절 풍습은 나중에 새로운 선교지에서도 갈등을 빚었다.

아일랜드의 켈트족은 ‘아일랜드의 사도’로 불리는 패트릭 덕분에 기독교로 개종이 이루어졌다. 앵글로색슨족의 공격을 받은 켈트족은 이후로 로마교회는 물론 콘스탄티노플 교회와의 관계까지 단절해버렸다.

덕분에 켈트족 나름의 고유한 기독교 체제와 예배 형식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주교의 지휘를 받지 않은 켈트족 기독교인들은 대신 자율적으로 수도사들과 수녀들의 지도를 받았다.

로마교회가 본격적으로 잉글랜드제도에 선교사들을 파송하면서부터 켈트교회와 긴장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켈트교회가 로마교회와 다른 시기에 부활절을 지키는 게 불화의 원인이었다.

664년에 문제의 해결을 위해 양측의 대표자들이 북잉글랜드 휘트비에서 모임을 가졌다. 종교회의에서 양측은 서로의 주장을 굽히려고 하지 않았다. 로마교회는 처음부터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켈트족마저 로마교회의 풍습을 그대로 수용하면 서방 전체가 한꺼번에 부활절을 축하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계기로 로마교회의 주교가 차지하는 입지가 한층 더 공고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편에서 예상치 못했던 반발이 제기되었다. 657년 휘트비에 공동체를 설립해서 수백 명의 수도사를 배출한 힐다와 또 다른 주교가 켈트교회를 편들고 나섰다.

두 사람은 켈트 기독교인들에게도 자신들만의 고유한 전통을 따를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치열하게 논쟁을 벌인 끝에 결국 켈트족 기독교인들이 로마교회의 풍습을 수용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이후로 서유럽 전체가 같은 날 부활절을 축하하게 되었고, 기대처럼 로마 주교의 영향력이 아일랜드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4세기에 부활절 시기가 확정되자 교회력 역시 오늘날처럼 주요한 특징들을 속속 갖추었다.

특히 전 세계에서 순례자들이 모여드는 예루살렘에서는 부활절의 시간과 공간이 확대되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보냈던 며칠간의 사건들에 주로 집중하던 기존 방식을 벗어나서 한 주간, 그리고 더 나가서 한 해로 확대되었다.

종려주일과 성목요일, 성금요일, 성토요일, 그리고 부활전야와 부활주일이 분리되어서 독립적으로 지켜졌다. 부활절과 오순절, 승천일, 주현절, 성탄절이 달력에 추가되었다.

이교 신들의 기념일이 제거된 달력에는 순교자들의 이름이 올라갔다. 예수님의 삶이나 사역과 직접 관련된 장소들마다 시간과 공간의 결합을 통해 새롭게 규례와 예배순서가 만들어졌다.

당시의 구체적 상황은 스페인 여성으로 381년부터 3년간 예루살렘 체류했던 에게리아의 순례기를 통해 일부 확인할 수 있다. 에게리아는 종려주일로 시작되는 성주간을 요일의 흐름에 따라 기록했다.

“이곳에서 ‘위대한 주간’이라고 부르는 부활절 주간은 종려주일로 시작됩니다. … 모든 사람들이 시편과 교송을 부르면서 (주교에게) 나가면서 줄곧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칩니다.”

이후 사흘 간 소규모의 예배들이 진행되었고 수요일에 장로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유다의 음모를 낭독하면 “사람들은 그 대목에서 신음을 내고 탄식”했다.

목요일에는 성찬식에 참여하고 나서 모두 “주교를 따라 겟세마네”로 향했다. 그리고 금요일에 겟세마네에서 진행되는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앞으로 나가서 조심스럽게 십자가 조각에 입을 맞추었다.

이처럼 부활절 논쟁으로 초래된 갈등을 거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시간에 대한 감각은 기독교적으로 변모했고 교회력의 유산 역시 한층 더 풍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