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부활을 사는 사람  아산천호교회 김주섭 목사

암으로 밑바닥까지, 그러나 다시 일어나 기적을 쏘다 혈액암, 생사 갈림길서 골수이식비 4,000만원 바쳐 교회당 건축 용지 매입 투병 후 끝내 교회당 완공

2021-04-07     황승영 기자

부활절을 맞아 암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나 기쁨과 감사로 삶을 살아가는 목회자를 만났다. 아산천호교회 김주섭 목사다. 그는 악성림프종으로 젊음을 바쳐 일군 개척교회와 성도, 가족 등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을 뻔 했다. 사랑하는 어머니마저 암으로 잃어버리고,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목회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아픔을 이겨내고 그는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처절했던 경험을 목회로 승화시켰다. 새로운 생명을 얻은 후 그에게 부활은 그저 교리적 신념이 아니라 삶으로 사는 것이 되었다. 

김주섭 목사(아산천호교회·62세)는 1998년 6월 충남 아산시 배명읍내에 아산천호교회를 개척했다. 천호동교회 지교회로 설립되었지만 가족 외에는 성도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동네 아이들에게 바이올린 플롯 등 악기를 가르치며 전도를 시작했다.

아이들이 한 둘씩 늘어나고 이제 오케스트라를 만들 생각에 몸이 피곤한 줄 몰랐다. 그런데 어느 날 서울에 가서 악기를 사 오던 날 밤이었다. 이상하게 피곤하더니 아랫배가 몹시 아팠다. 다음날 동네 병원을 찾았다. 약을 먹었는데도 차도가 없었다.

큰 병원에 가보라는 의사의 소견대로 서울 구로동 고려대병원에서 초음파 검사를 했다. 검사 결과, 소장과 대장 사이에 9cm가량의 종양이 발견되었다.

혈액암의 일종인 악성림프종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왼쪽 아랫배에서 혹이 손으로 잡힐 정도로 컸지만 개척 목회 때문에 제대로 몸을 돌볼 겨를이 없어 암을 키우고 말았다.

개척 1년, 이제 목회가 뭔지 보이기 시작했는데

개척 1년 이제 목회가 뭔지 보이기 시작했는데 날벼락 같은 암이 찾아온 것은 충격이었다. 선택의 여지 없이 곧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여섯 시간에 걸쳐 대장과 소장 일부를 절제했지만, 주변에 전이된 암은 손을 못 댔다.

여덟 번에 거쳐 항암 주사를 맞았다. 온몸에 털이라곤 눈썹 한 가닥조차 남기지 않고 다 빠졌다. 옆에 사람이 있어도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여러 번이었다.

고개를 돌릴 힘조차 없을 만큼 체력이 소진되었지만 암세포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눈물만 나올 뿐, 죽음에 가까운 상황이 점점 다가왔다. 그때 그의 나이는 고작 41세였다.

“하나님, 사모와 아이들이 아직 너무 어리네요. 개척하러 여기까지 왔는데, 죽어버리면 이 상처는 어쩌고, 이러다가 믿음마저 떨어지면 어떡합니까?” 김 목사는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자신보다 세상에 홀로 남은 어린 자식과 가족의 믿음이 더 걱정되었다.

절망 끝에 하나님께 생명을 맡기다

항암치료에도 호전이 없자 병원에서는 골수이식을 제안했다. 한 번에 2,000만원이 들어가는데, 최소한 두 번은 받아야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고 이식이 성공할 확률이 높은 것도 아니었다. 김 목사와 손종옥 사모는 고심 끝에 골수이식을 받지 않기로 했다.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다. 어차피 하나님께 생명을 맡긴 만큼 골수이식을 한 셈 치고 이식비 4,000만 원을 하나님께 바쳤다. 병원비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이 컸지만 일종에 선불 감사 헌금이었다. 그의 목숨값과 같은 이식비는 미래를 위한 교회당 건축용지를 사는 데 썼다.

그의 헌신이 마중물이 되어 교회 내에서 땅 한 평 사기 운동이 벌어졌다. 그렇게 4,000만원이 더 모여서 총 8,000만원의 대지구입금이 적립됐다. 그것이 종잣돈이 되어서 마침내 현재의 교회당 용지를 살 수 있었다.

어른 성도가 고작 10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아이들밖에 없는 개척교회에서는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기적이 그다음에 일어났다. 땅 매매 계약 후 일주일 만에 교회 주변에 도시계발계획이 발표됐다. 땅값은 천정부지로 솟았다.

훗날, 그 땅에 아산천호교회가 새 교회당을 건축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의 갈림길에서 목숨보다 내일을 생각한 그의 믿음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그의 시련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의 암 발병, 한 달 뒤에 어머니 역시 담도암 판정을 받았다.

아들의 완치를 위해 기도하던 어머니마저 암으로 쓰러지면서 집안 분위기는 침울했다. 졸지에 아들은 안방에서, 어머니는 건넛방에서 암 투병을 하는 꼴이 되었다.

사모는 어려운 개척교회와 가정을 돌보면서 남편의 병간호와 시어머니의 병시중까지 들어가며 고통을 감내했다. 하루하루가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아내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끝내 아픈 아들을 두고 먼저 눈을 감았다.

하나님의 치유 손길이 시작되다

병원에서는 마지막으로 방사선 치료를 권했다. 작은창자의 얇은 막이 방사선에 의해 암세포보다 정상 세포가 상할 위험이 있는 시술이었다. 효과를 기대하기보단 최후의 수단이라는 생각으로 치료에 들어갔다. 15일 단위로 오가는 입원 치료로 주일을 병원에서 보내는 일이 힘들었다.

개척교회 담임목사로서 강단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무척 괴로웠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앉아 있을 체력도 되지 못했지만 봉헌기도와 축도 만큼은 직접 하고 싶었다. 항암치료 후유증이 가라앉을 때는 의자에 앉아서 설교도 했다.

그러다가 강단에서 쓰러져서 업혀 나간 적도 있었지만 담임목사의 투병으로 힘들어하는 성도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강단을 지키려고 애썼다.

그러던 어느 날 흰돌산기도원에서 열리는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했다. 앉아있기도 힘들어 기도원 맨 뒤 벽에 힘없이 기대어 있었다.

그때였다. “아산에서 오신 김주섭 목사님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소리가 들렸다. 강사 윤석전 목사가 그를 찾는 소리였다. 갑자기 목회자 수천 명이 모인 기도원 맨 앞자리로 나갔다. 윤 목사는 “저도 네 번 죽을뻔한 경험이 있었는데, 은혜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김 목사님도 병을 이기면 큰 목회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며 회중석을 쳐다보고 앉아 있으라고 주문했다. 죽을힘을 다해 끝까지 앉아서 집회에 참석했다.

윤 목사는 수시로 안수기도를 해주었다. 그리고 토요일에 내려와 방사선 치료를 계속 받았다. 2000년 3월 드디어 6주간의 방사선 치료를 마쳤다. 놀라운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암세포가 깨끗이 사라졌다.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김 목사는 “의학이 아닌 하나님의 손길로 치유하여 주신 결과라고 믿는다”고 고백했다. 5년 후 그는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는 “매일의 생존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며, 산 비와 기적임을 깨닫된다”며 “늘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목회를 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다시 사는 삶은 선교와 미래가치 투자

투병 중에서도 성도는 꾸준히 늘었다. 2005년 아이들이 절반이긴 해도 성도 수가 140명이 됐다. 청소년이던 아이들도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그해 교회당 건축을 선포했다.

그러나 건축 문제로 몇몇 기둥 같은 일꾼이 교회를 떠났다. 아픔을 겪었지만 인내하며 기다리자 성도들 스스로가 교회당 건축을 하자는 분위기가 일어났다.

2010년 4월 단 한 명의 반대 없이 교회당 신축에 들어갔다. 쉬운 일이 없다고 건축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21개월 만에 교회당이 완공됐다. 비록 많은 빚을 얻었지만 새성전 입당기념으로 선교사를 파송했다.

당시 막대한 이자 부담으로 그는 사례비를 몇 달째 받지 못했다. 그래도 건축비를 갚다 보면 하나님께 진 빚을 갚을 길 없을 것 같아 선교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선교사 후원도 하나 둘 씩 늘렸다. 매년 필리핀 태국 캄보디아 대만 일본, 중국 등으로 해외 선교의 지경도 넓혔다.

다음세대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단독으로 여름성경학교를 열 수 없는 처지에 있는 교회의 아이들을 모아서 연합성경학교를 매년 열었다. 그러다 보니 다음세대만 240명이 모이는 교회가 됐다.

코로나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아산천호교회의 인원과 재정은 오히려 늘어났다. 시련은 있어도 포기하지 못하는 그의 목회는 언제나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선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는 삶도 여전히 부활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