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부활 

이성훈 목사의 부활의 신학

2021-03-31     이성훈 목사(임마누엘교회)
        이성훈 목사

사단의 패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를 상징했으며, 그 분 안에서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이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을 열면 가장 처음에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세상의 주관자요, 모든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 놓인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존재였습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최소한 몇 몇 천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권세를 양도받아 각자의 임무를 감당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미가엘 천사장에게는 이스라엘을 보호하며 전쟁의 임무가 주어졌고(단 12:1), 가브리엘 천사는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에게 전하고 해석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단 8:16; 눅 1:19)    

천사의 타락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는 한 천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건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 14장 12~13절은 외견상으로 볼 때 바벨론과 바벨론 왕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사단의 세력’을 빗대어 사용했었다는 점에서 이사야 말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의 세력’에 관한 상징입니다.(계 14:8; 16:19; 17:5; 18:2, 14, 15, 21)

12절에서 ‘계명성’은 원어 ‘헤일렐’을 번역한 용어인데 본래는 ‘빛을 내는 가장 밝은 별’을 의미하는 ‘할랄’에서 유래했습니다. 이것을 벌게이트 역에서는 ‘루시퍼’(Luciffer)라고 번역하였고, KJV와 NKJV도 이 번역을 따르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도 ‘루시퍼’는 타락한 천사 사탄의 또 다른 명칭으로 통했습니다. ‘루시퍼’가 ‘하늘에서 떨어’(12절)진 이유는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루시퍼’는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14절)고 함으로써 어떤 영적인 존재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헛된 욕망을 품었습니다. 또한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14절)고 함으로써 최고가 되고자 하는 탐욕을 드러냈습니다. 결정적으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지극히 높은 이 (히. 엘리욘)와 같아지리라”(14절)는 마음까지 품은 것을 감안할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으시다고 평가하신 인간을 그냥 놔둘 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히.쩰렘)대로 창조하셨습니다.(창 1:26) ‘하나님의 형상’ (히. 쩰렘)이란 말은 본래 ‘그림자’를 의미하며, 그 의미가 발전하여 현대에는 ‘사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그림자가 실체의 모양을 반영하듯이 하나님이 매우 소중하게 우리를 만드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히. ‘라다’ 창 1:26) 권세를 주셨습니다(창 1:26). 여기에서 ‘다스리다’(히. 라다)는 말은 ‘세상의 창조물을 죽일 수 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권리’를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동물에게도 주셨던 복(22절)외에도 인간에게는 다른 피조물에게는 허락하지 않은 ‘정복하고’(히. 카바쉬 창 1:28) ‘다스리는’ (히. 라다)권세까지 겸하여 주셨습니다. 인간이 원하는 모든 곳은 어디든지 삶의 터전으로 삼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토록 인간을 특별하게 여기셨음에 대해서 시편 8편 5절은 ‘인간’(히. 에노쉬)을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돌보시고 하나님보다는 조금 못한 존재로 세우셔서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신 일에 대하여 감격해하며 찬양했습니다. 많은 용어 가운데 ‘인간’으로 번역된 ‘에노쉬’라는 용어는 ‘연약하고 깨어지고 부서지기 쉽다’는 뉴앙스를 담은 표현입니다. 즉 그런 인간을 하나님이 왜 그토록 소중히 여기셨느냐는 것입니다.

사단의 유혹

한편 누구보다도 높아지고 심지어는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헛된 마음을 품은 사탄이 인간에게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대우와 그들과의 친밀한 교제를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뱀의 모습을 한 사탄(계 12:9)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속임수와 거짓말로 유혹했습니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는 속임수로 인해 결국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사탄의 종이 됩니다.

사탄은 ‘지극히 높은 이’ (히. 엘리욘 사14:12)와 같아지고자 했던 자신의 헛된 욕망을 하와도 동일하게 품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경고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육신의 죽음은 물론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과 동시에 인간은 죄에 결박되어 사단의 영향권에 안에 들어갔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권세 역시 사단에게 넘어갔습니다.(눅 4:6)

타락 이후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다는 것(창 3:18)은 인간이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상실했음을 상징합니다. 결국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했고(요일 5:19), 마귀는 이 권세를 마치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양 거짓 행세를 하였습니다. 심지어 세상을 창조하시며 모든 권세의 주인되신 예수님께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 자신에게 절을 하면 자신에게 양도된 권위와 영광을 주겠다며 허세를 부렸습니다.(눅 4:6)

구원의 계획

하나님은 처음부터 죄를 지은 인간을 구속하고 인간의 위치를 다시 회복시키는 일을 계획하셨고, 그 중심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불순종함으로 인해 패배로 끝난 전쟁과 종의 노예가 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본체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질이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사탄이나, 혹은 첫째 아담과는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철저히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첫째 아담은 불순종으로 끝난 반면, 둘째 아담 되시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 2:6~8)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과 깨어진 모든 화평의 관계는 물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와 사단에게 빼앗겼던 만물을 지배하라는 권세가 모두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마 28:18). 사단의 패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를 상징했으며, 그 분 안에서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고후 5:17~18)

부활의 신비

이런 점에서 우리는 부활의 놀라운 신비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온전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인성을 보여준다면 부활은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사건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죄를 사하셨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입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또한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고 말씀하신대로 인류 최대의 난제가 되었던 ‘죽음’의 문제가 예수님의 부활사건으로 완전하게 해결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부활은 마귀의 강력한 무기였던 죽음의 권세를 무력화시키고(골 2:15), 새 창조와 생명의 시발점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요 11:25)이요 라고 말씀하신대로 예수께서 생명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700여년 전 호세아 선지자는 (호 13:14)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이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깨뜨릴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사망권세가 속절없이 무너졌음을 강조하였습니다(고전 15:55). 이와 같이 구약의 예언자들은 물론 심지어 초실절과 같은 구약의 절기는 일찌감치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하여 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해 언급하며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전 15:4)고 말했는데 여기에서 ‘성경대로’라는 표현은 ‘구약성경대로’라는 의미입니다. 구약 성경의 약속대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들 가운데 단 12장 2절은 부활예언에 관한 한 빼 놓을 수 없는 으뜸되는 말씀입니다.

이제 마지막 날 보편적인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만을 믿어왔던 초대교회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관을 열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좇을 때에 당연히 겪을 수 밖에 없는 수많은 고난과 핍박이 언제, 어디서, 그리고 무엇이든지간에 덤덤하게 견딜 수 있게 하는 분명한 신앙고백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구약에서의 부활 예언에 대한 성취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물론이요 무엇보다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붙잡고 소망하며 살아가게 하는 분명한 힘과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