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성결교회에 사심없이헌신한 장로 3

나환자 자활촌 건설과 동문교회 설립

2008-07-26     류재하 목사

남영호가 어느 날 김천의 외각을 가로지르는 감천다리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추운 겨울인데도 다리 밑에서 불을 피워 연기를 내며 가마니와 거적을 두르고 사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거지인 줄 알았는데 나환자들이었다. 코가 없어지고 손가락이 없어 보기에 흉측스러웠다. 그래서 사람들이 멀리하고 괄시와 천대하여 동네에서 쫓겨나 다리 밑에서 모진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그는 아는 의사에게 감천다리 밑에 사는 나환자들에 대해서 물었더니, 그들은 고침을 받은 음성 나환자라고 했다. 그들은 병이 나아 전염되지 않기 때문에 동네에서 살아도 되지만 사람들이 전염되는 줄 알고 멸시한다는 것이었다. 남영호는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는 뜻을 같이 한 교회 친구들과 함께 동문 밖에 버려진 언덕에 판자집 몇 채를 짓기 시작했다. 그들은 목수가 아니지만 허름한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감천다리 밑으로 가서 나환자들을 데리고 와서 판자 집에 살게 했다. 처음에는 2가족이었는데, 차츰 소문을 듣고 나환자들이 찾아와 한 달 만에 10가족, 3달 만에 30여 가족으로 불어났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건국이 선포되고 군정이 끝났다. 그는 시청에 가서 직원을 통해 사연을 말하고 동문 밖 시유지 언덕 일대 약 4만평의 땅을 임대받았다. 당시는 행정체계가 되어있지 않아서 누구나 신청만 하면 허가가 나왔던 것이다. 그래서 소문을 듣고 모여든 나환자들을 모두 수용해서 살게 했다.

그러나 그들이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구걸뿐이었다. 남영호 집사는 그들의 생계를 위해 양계사업을 생각했다. 그들을 설득하여 집집마다 병아리를 나눠주며 키우게 했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 주일마다 좀 크게 지은 판자 집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세상에 소망이 없는 그들은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고 열심히 뜨겁게 믿었다.

1950년 3월에 남영호 집사는 남산교회에서 장로장립을 받은 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8군 연락장교단의 총무과장이 되어 부산에서 경상도 일대의 질서회복에 힘을 썼다. 그리고 1953년에 김천으로 복귀하여 교회부흥을 위해 힘쓰는 한편 그동안 버려진 나환자촌의 자립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은 우선 생계가 힘들었다. 그는 나환자촌을 본격적으로 개발하여 이름을 ‘삼애마을’로 짓고, 양계사업을 크게 벌려 ‘삼애농원’으로 지었다.

삼애(三愛)는 그의 삶의 철학으로 3가지 사랑, 즉 하나님 사랑, 나라사랑, 이웃사랑을 하자는 것이다. 삼애마을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나환자들이 몰려왔다. 그래서 삼애마을은 2백여 가구, 주민이 8백여 명으로 성장했다.

양계사업이 점점 잘되어가자, 나환자 신자들이 십일조와 감사헌금으로 마을 한복판에 ‘동문성결교회’를 새로 크게 지어 봉헌했다. 담임목사를 모시고 집사와 장로들을 세우며, 매 집회마다 5백명 이상 모여 뜨겁게 기도하고 은혜 받았다. 그들의 자녀들은 사회적으로 교사, 공무원, 의사, 회사원들로 성공적으로 진출했다.

남 장로는 나환자들을 거두어 영혼과 육신이 아울러 잘 살게 하는 공로로 1967년에 보사부장관의 표창을 받았다. 남 장로는 나중에 삼애마을 4만평을 정부로부터 불하받아, 토지와 집을 나환자 각 개인 명의로 등기해 주었다.

그들이 자가용 승용차도 굴리고 다녔지만 정작 남 장로는 승용차 없이 버스와 기차를 타고 다녔다. 그처럼 남 장로는 사심없이 봉사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