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새 술은 새 부대에
지난호 데스크칼럼을 읽고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우선 제목부터 이상하다. “찍어낼 것인가? 다시 말라고 보낼 것인가?” 무슨 뜻인가? 내용을 읽어보니 더 헷갈린다. 단초는 ‘총회본부 재정비리 문제’이다. 조 기자는 “총회본부 재정비리 문제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혼란스럽다. 본지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자료를 첨부하여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잘못을 저지르고도 다른 문제로 혼선을 조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러하다”라고 말한다. 조 기자는 지금 전자의 이유보다 후자의 이유를 더 주목하는 듯하다.
하지만 사실에 대한 혼선은 원초적으로 사실보도를 외면한 제도권 언론의 책임이다. 궤변과 요설이 준동하는 것은 진실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후자의 이유는 전자의 이유에 종속적이다. 아니 전자의 이유가 후자의 사태를 초래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인사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본지의 보도 의미를 축소하거나 ‘오보’라고 깎아 내린다. 그렇게 해도 한국성결신문은 ‘교단을 위해’, ‘교단 지도자들을 위해’ 보도하지 않을 것이라 여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건 대체 무슨 말인가? 당장 ‘보도 의미’라는 말부터 목에 걸린 가시같이 삼켜지지 않는다. ‘보도 의미’라니? 조 기자가 설마 ‘보도의 의미’와 ‘보도 의미’를 구분하지 못해서 이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터.
도대체 조 기자는 이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가? 조 기자가 말하는 ‘보도 의미’란 자신(혹은 성결신문사)이 파악하고 있는 사실 모두를 실체적으로 보도하지 않고 ‘자제 아닌 자제’를 해 왔다는 것이다. 쉬운 말로 ‘변죽을 울렸다는 뜻이다. 그 이유가 기가 막힌다. 교단을 위해, 교단 지도자들의 권위를 위해서란다.
심지어 그는 실체적으로 제대로 보도했으면 성결교회가 심각하게 상처를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성결신문)이 총회본부 재정비리 문제에 대해 얼마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는지 헤아려 달라고 첨언한다.
좋다. 다 좋다. 조 기자가 말하는 대의와 금역을 존중해주자. 하지만 ‘교단의 권위와 교단지도자들의 권위’를 동일시하는 오류는 지적받아야 마땅하다. 함량미달이거나 거의 범죄자 수준인 일부 교단지도자들의 위장된 권위를 은폐하는 것이 어떻게 교단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일부 인사들이 “보도하지 않을 것으로 여긴다”는 말은 더욱 심각하다. 이 말은 우선 표현방식부터 수정해야 한다. 그들은 지금 ‘보도하지 않을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보도하지 못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양자는 천지 차이다. 단적으로 ‘보도하지 못할 것’이란 말은 너나 나나 같은 부류라는 뜻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음에도 조 기자는 여전히 ‘아직은 기다린댄다.’ 코메디도 이런 코메디가 없다. 이 말을 듣고 ‘양심에 찔림을 받아’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 회개할 사람은 적어도 성결교회 안에는 없다.
단언하건대. 제105년차 교단총회 후 송윤기 목사의 선거결과 불복사태와 일련의 비상식적인 행태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교단의 수치이다. 성결교회는 이미 상처를 받을 만큼 받았다. 더욱이 그가 연루된 ‘총회본부 재정비리 문제’라니.
이 시점에서 성결교회가 더 이상 받을 상처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최소한의 역사의식과 부끄러움을 아는 교단이었다면 애초 사태를 여기까지 끌고 올 리도 없었을 터. 지금이라도 ‘성결신문’은 확보하고 있는 ‘실체적 진실’을 ‘있는 그대로’ 사실 보도해야 한다.
심층취재는 못하더라도 확인된 사실보도조차 좌고우면하다니. 차제에 총회본부 재정비리 문제만이 아니라 교묘한 말장난으로 공사(公私)의 경계를 허무는 교단 내 여우같은 인물들의 이면도 사실에 입각해 폭로하고 고발해야 한다. 그들이 결코 ‘보도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 금기를 깨는 것에서부터 ‘성결신문’은 새로 태어나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