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어 원어로 푸는 세상이야기<27>
새해의 명훈, 카이로스를 잡자! “ kairovz”
2012년이 움트는 임진년(壬辰年)은 이른바 용의 해이다. 용(龍)은 동양에서는 매우 상서로운 동물로 알려져 있지만, 서구 사회 특히 성서에서는 불길함과 징벌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고대사회에서 용과 관련된 신화이야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시간 의식에 뿌리 깊이 침투해 있는 것 같다. 용은 시간의 계기와도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헬라어 원어에는 시간을 의미하는 두 종류의 단어가 나타난다. 하나는 수치화, 계량화 할 수 있는 일반적 시간인 ‘크로노스’(crovzuoz, 신약성서에 54번 등장)인데, 이 시간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양적인 시간, 인간의 시간 즉 세월을 가리킨다. 또 다른 하나는 특별한 계기나 의미가 부여 되는 시간인 ‘카이로스’(kairovz, 신약성서에 85번 등장)이다. 이것은 질적인 시간, 결정적인 순간의 시간, 기회의 시간, 변화된 시간을 의미한다. 시간이 이렇게 둘로 나누어진 이유는 고대신화에서 기원한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자식을 낳자마자 잡아먹는 비정한 신이 나온다. 한 손에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낫을 들고 있고, 다른 한 손에는 모래시계를 든 그가 바로 ‘크로노스’인 시간을 다스리는 신이다. 크로노스가 자식을 낳자마자 잔인하게 잡아먹는 이유는 자식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신탁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아내 레아는 막내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그 자식을 숨기고 대신 돌덩이를 크로노스에게 줌으로써, 구사일생으로 어린 자식을 살린다. 그가 바로 제우스이다. 제우스는 장성하여 결국 아버지를 죽인다. 하지만 크로노스의 죽음으로 이제 시간이라는 것은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고, 그 결과 세월은 브레이크 없이 마냥 흘러만 간다.
또 다른 시간의 신은 ‘카이로스’이다. 카이로스는 앞을 볼 수 없어 번민이 많은 불운한 신이었다. 그는 양손에 칼과 저울을 들고 기회라고 생각할 때마다 냉철한 판단을 하여 먹을 것은 얻을 수 있었으나 조금이라도 주저할 때는 어깨에 있는 커다란 날개와 두 발에 붙은 작은 날개 때문에 가차 없이 떠밀려 날아가 버린다. 게다가 앞머리가 무성하여 기회를 금방 알아차리기 어렵고, 뒷머리는 민머리여서 망설이며 아차 하는 순간 그 기회를 놓친다. 이처럼 번민이 많고 불행한 카이로스가 판단의 시간, 기회의 시간, 인식의 시간을 관장하는 신이다.
시간이란 이처럼 아무리 수치화, 계량화 한다고 해도 인간의 능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측면이 있는 것이고, 동시에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기회라고 생각하는 그 때(kairos)가 오면 반드시 놓치지 말고 붙잡아야 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새해를 맞이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시간 개념이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다. 전자는 삶의 시간 혹은 세속의 시간이라면, 후자는 하나님의 시간, 신앙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때라고 하는 것, 인생의 기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바로 그 때에 은총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삶의 시간은 마치 신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아무리 시간을 내 손으로 붙잡아서 다 활용하고 싶지만 어느새 모래처럼 내 뒤로 빠져나가 사라질 뿐만 아니라, 낫으로 잘게 부수고 바쁘게 조각조각 나누어서(time) 써야 하는 인간의 비참한 운명을 반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시간은 반드시 하나님에 의해서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변화가 일어나야 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도우셔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 그에 따른 각오와 결심을 해보기도 했지만, 언제부터인지 그것마저도 소용없다는 듯이 체념하면서 마냥 시간을 흘려보낸다. 크로노스의 운명도 기구하지만, 카이로스의 교훈도 기억해야 한다. 인생을 살면서 우물쭈물 주저하는 사이에 세월도 흘러 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좋은 기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때를 놓치고 만다는 사실을 말이다.
옛날 송대(宋代)의 주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少年易老學難成(소년이로학난성), 一寸光陰不可輕(일촌광음불가경)”, 즉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잠깐의 시간이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올해도 우리의 삶은 씨줄(크로노스)과 날줄(카이로스)이 엮인 숙명의 두 시간 틀 속을 거닐며 바쁘게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명심할 점은 기회는 망설이다 지나가고 나면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임진년 나의 이익과 물질을 위해서만 시간을 악용·남용·과용하지 말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선용하는 값진 시간을 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