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산책<3>
목숨까지 걸고 받았던 세례
한국의 기독교는 한국인 구도자들의 선구적인 노력에 의해 시작되었다.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한반도에는 성경이 유포되고 있었고, 세례 지원자들도 다수 배출되어 있었다. 또 소래와 의주 등에는 기독교 신앙공동체도 형성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 행해진 세례의 첫 번째 한국인 주인공은 누구일까? 그는 바로 노춘경(盧春京)이다. 그 역사적인 세례식은 1886년 7월 11일 주일 헤론 선교사의 집에서 언더우드의 집례로 비밀리에 거행되었다.
노춘경의 세례는 “황무지에서 장미꽃이 피는 한국교회사에서 길이 빛날 역사적 순간이었다." 신앙과 선교의 자유가 없었던 한반도에서 한국인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대단한 확신과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발각되는 날에는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아펜젤러는 당시 어려웠던 마음을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로서는 그 의식이 대단히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한국인들의 분노를 사게 될 매우 큰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신 분께서 그를 지키시리라고 기도한다."
한국에서는 1898년 6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복음전도의 자유가 주어졌다. 정부가 스왈른(W. L. Swallen) 선교사에게 ‘인전교사'(因傳敎事, 전도에 관한 일)를 허락하는 호조(護照; 일종의 여행증명서)를 발행한 것이 그 시초였다. 이때부터 선교사들의 복음전도 활동이 법적으로 보장받게 된 것이다.
이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한 지 13년만의 일이었다. 따라서 이전에 선교사들은 한국인에 대한 복음전도나 종교행위에 있어서 매우 신중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많은 경우 정부에서는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감아 주었고, 노춘경은 그런 노력의 첫 열매였다.
노춘경은 기독교 배척문서를 통해 기독교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885년 말경 헤론의 한국인 어학선생에게 접근했다. 헤론의 어학선생이 언더우드와 연결해 주었지만, 노춘경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1886년 봄, 알렌을 찾아간 노춘경은 한문으로 된 성경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알렌은 아직 그런 일은 시기상조이며 매우 위험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에 노춘경은 알렌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한문으로 된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을 훔쳐 몰래 집으로 가져갔다. “그는 밤새 그 책을 읽고 아침에는 그것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이후 노춘경은 언더우드의 개인적인 양육을 받으면서 기독교 진리를 깨닫고 자원하여 세례 받고자 했다. 그리고 언더우드가 묻는 세례문답에 매우 분명하게 대답했다. 언더우드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세례의 위험성을 주지시켰다. 그러나 노춘경은 “그런 것들이 나에게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의 경우에 목숨까지도 버릴 준비가 되어있다"고 대답했다. 한반도 최초의 한국인 세례는 이렇게 해서 베풀어졌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 내한선교사들이 사람들을 얻는데 급급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이와 같은 거사(巨事)는 국법을 거스르는 것으로 생명을 걸고서라야 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세례 자원자들에게 이런 모험의 본질을 설명하며 오히려 만류하는 입장이었다. 많은 사람을 얻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것보다도 복음의 진정한 본질, 즉 복음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소유해야 할 가치가 있음을 깨달은 한 사람이 더욱 소중했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토대는 ‘값진 진주를 사기 위해 모든 소유를 팔았던 진주장사처럼' 복음의 진수를 깨달은 자들에 의해 닦여졌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이제 믿음의 토대를 세운 선조들의 신앙양식을 거울삼아 세례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