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6호>주간 말씀묵상

민수기 33장 1절~49절

2011-08-17     정찬 목사(간평교회)

기억하고 생각하라

누구나 좋은 것만 기억하려 하는 습성이 있다. 좋지 않은 기억을 가급적 피하려는 것은 삶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것 같이 여겨지는 콤플렉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좋지 않은 기억 역시 삶에 중요한 가치를 제공해 주는 것 같다. 좋지 않은 일이지만 그것을 기억해 내고 깊이 생각함으로 오늘의 나를 살필 수 있으며, 또한 내일의 나의 길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르우벤과 갓 지파의 요청으로 빚어진 갈등이 잘 해결된 후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제까지의 출애굽 여정을 기록하라 명하셨다. 40년이 걸린 여정의 출발지는 라암셋. 때는 정월 십오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리신 큰 재앙으로 이집트 사람들의 맏아들이 죽임 당했고, 그들은 장례를 치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스라엘은 비로소 이집트 사람들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신들을 억압했던 이집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나왔던 이스라엘 사람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의 손길 덕이지 않은가.

40년이 걸려서 이곳 모압 평지까지 모두 40여 곳을 지나온 여정이었다. 블레셋 땅을 지난다면 보름 만에 갈 수 있는 거리임에도 40년의 긴 세월을 광야에서 지내야 했다. “라암셋을 떠나 숙곳에 진을 치고 숙곳을 떠나 광야 끝 에담에 진을 치고….” 떠나고, 진 치기를 반복하면서 이스라엘은 마침내 모압 평지에 이른 것이다.

라암셋에서부터 시내광야까지의 여정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은혜로운 여정이었다. 바다를 육지같이 건넌 일, 쓴 물이 단물로 변하는 기적, 광야의 양식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 위에서 치솟은 물, 아말렉을 물리 친 쾌거, 모두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여정엔 어떠한 장애도 문제되지 않음을 확신케 했다. 없음의 환경, 뜻하지 않은 위기. 이런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원망도 하고 불평도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감싸시고 그 때마다 도움의 손길을 펼쳐 주시지 않았던가. 크고 놀라운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하는 여정이었다.

시내광야에서부터 가데스까지의 여정은 불신앙의 여정이었다. 까닭 모를 불평으로부터 음식 때문에, 때로는 모세의 지도력 때문에 불평을 터뜨렸다. 시내광야에 이르는 동안 이미 필요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어떠한 어려움과 위기가 찾아와도 잠잠히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하고도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불신앙의 극치가 아니고 무엇이랴.

가데스에서부터 호르산에 이르는 여정은 죽음의 여정이었다. 정탐꾼 열 사람의 보고는 이스라엘을 절망케 했다. 갈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반드시 주실 땅’이라고 설득했어도 이스라엘은 ‘차라리 이 광야에서 죽는 편이 낫다’고 했다. 이 얼마나 믿음 없는 말인가.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이집트에서 나온 세대들이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하나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 광야에서 죽음을 맞았다. 실패의 여정이었다.

이스라엘의 불신앙, 그리고 그로 인한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은 결코 파기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광야의 새로운 세대로 하여금 목적을 이루시고자 하셨다. 이제 다다른 모압평지에서 이스라엘은 강 건너 가나안 땅을 보았다. 모압평지에 이르기까지 위기의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미디안 대군을 물리쳐 승리하게 하셨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 것인지도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은 왜 이 모든 여정을 기록하라 하셨을까? 기억하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단지 광야 40년의 여정에서 ‘떠나고 진치고’를 반복한 그 지리를 익히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여정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는지,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도 그들이 보인 삶은 어떠했는지 기억을 더듬고 생각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기억하기 싫은 불신앙의 여정, 원망과 불평과 반역으로 얼룩진 여정, 그래서 실패한 여정이었음에도 변하지 않은 하나님의 언약이 이끌어 가시는 여정이었음을 기억하게 하심이 아니겠는가?

내 삶의 여정을 떠올려 생각해 본다. 고난을 경험했던 때는 언제였나? 그 때 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렸던가? 실패였다고 평가되는 여정이 있었는가? 그 때 나는 어떻게 행동했었나, 그리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가? 그 때 가까이 다가온 주님의 손길을 굳게 붙잡았는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주님, 어려움과 위기가 닥쳐와도 믿음 없이 행하지 않게 하시고 변함없이 역사하시는 주님만 바라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