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어 원어로 푸는 세상이야기<19>
스칸달론을 조심하라!, “skavndalon”
하루가 멀다 하고 교회가 언론으로부터 집중적인 타격을 받고 있다. 포화를 뚫고 나갈 수 없을 정도로 사방에서 폭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포격이란 한 번 탄착군이 형성된 곳에는 다시 떨어지지 않는다는 전술교리가 있다. 그런데 지금 종교는 맞은 곳에 또 포탄이 떨어진 격이 되고 말았다. 교회가 명예, 재물, 권력 등에 맛 들어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스캔들이라고 말한다.
스캔들(scandal)이라는 말은 자구대로 번역하면 ‘추문’이라는 뜻을 갖고 있지만, 원래는 거꾸로 매달아 올리는 ‘올무’, ‘덫’, ‘함정’이라는 뜻의 헬라어 “skavndalon”(스칸달론, 신약성서에 15번 등장)에서 유래한 말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보면 미의 여신 비너스와 군신(軍神) 아레스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어느 날 비너스는 남편 헤파이토스(대장장이 신)의 눈을 피해 아레스와 바람을 피우다가 자신의 남편이 설치해놓은 그물에 걸려들어 발가벗긴 채 사로 잡힌다. 그리고 그들은 허공에 매달려 모든 신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바로 이 신화에서처럼 ‘걸려들게 하다’, ‘넘어지게 하다’라는 뜻의 동사 “skandalivxw”(신약성서에 29번 등장)에서 유래된 것이 스캔들이다.
이 개념을 변증적, 수사적으로 사용하여 사도 바울과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증거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이성적, 혹은 신앙적 전통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걸림돌’(스칸달론)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인들의 철학적 사고, 즉 로고스적 사유에서는 그것을 매우 “어리석다”(moria). 반면에 유대인들에게는 나무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메시아)는 약하고 비천하기 이를 데 없는 모멸적인 것일 뿐, 신적인 힘의 표징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역시 추문이요, 걸림돌 즉 스칸달론이었다.
스칸달론은 원래 인간이 육체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신성을 더럽힌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걸림돌은 죄를 짓게 하거나 신앙을 방해하는 일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성서에서는 달리 “실족케 하다”(마 5:29, 눅 17:2, 요 16:1) 혹은 “죄를 짓게 하다”는 뜻으로 번역을 하기도 한다. 보다 더 정확한 뜻풀이는 사람이 걸어가는 보행길에 걸림돌을 두어 그 사람이 발에 채여 넘어지게 하는 일을 말한다.
1세기 유대인들이나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사건은 자신들의 전통과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스캔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는 사건이 2천년의 세계 역사에서 인류의 가치, 윤리, 철학, 예술, 정치, 제도 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제 괄목한 만한 부흥을 이룬 한국교회 자신이 세상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이루었다고 하는 목회자도 숱한 역경 속에서 예수의 스캔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음에도, 자신의 가족으로 인해서 스캔들이 되고 있다.
이 아이러니를 어찌 극복해야 하는가. 어느 새 한국 사회는 교회가, 아니 종교가 자신들의 삶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처음에는 작은 돌에 발이 채이면 그것을 보지 못한 나의 실수이겠거니 하겠지만, 한 번, 두 번 지속적으로 채이기 시작하면 짜증과 화가 날 것이고 급기야 그 자그마한 돌조차도 뽑아버리려 할 것이다. 너무 깊이 박혀 있는 돌이다 싶으면 외면하고 돌아갈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을 더럽히면서 스스로 덫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굳이 물질이나 명예, 권력을 추구한다고 해서 속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으나, 유사 이래로 그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발목을 잡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교회는 이제 그리스도교의 신앙이란 약함에서 피어나는 강함과 확신이라는 역설을 말해주어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비참과 어리석음이 아니라 완성과 성취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어야 한다. 정녕 교회가 그러지는 못할망정 스스로 추문(스칸달론)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