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어 원어로 푸는 세상이야기<16>

파라클레토스여, 도와주소서! “paravkltoz”

2011-06-22     유복곤 박사(삼성제일교회 협동)

사회가 불안할수록 범죄가 늘어나다 못해 그 양상 또한 사뭇 달라진다. 이러한 현상은 그만큼 경제나 사회가 불안하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사람들은 자신을 위로해주고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줄 대상을 찾는 것 같다. 최근 주식투자자들이 500만 명 가까이 급증을 했다고 하는 것을 보니 사람들이 마음을 둘 곳이 없다는 반증이 아닐까 걱정도 된다..

성서에서는 우리들 옆에서 변호도 해주고 위로를 해주는 존재를 파라클레토스(paravklhtoz)라고 부른다. 신약성경에서 단지 요한문헌에만 5번 등장하는(요 14:16, 15:26, 15:26, 16:7, 요 1 2:1) 이 독특한 용어는 ‘누군가를 부르다, 위로하다, 격려하다’라는 동사 파라칼레오(parakaleo, 신약성서에 109번 등장)에서 나온 명사로서 ‘권면, 위로’라는 뜻의 명사 파라클레시스(paraklesis, 신약성서에 29번 등장)와도 어원을 같이 한다. 영어성경은 헬라어 paravklhtoz를 ‘comforter’(위로자), ‘helper’(돕는 자) ‘advocate’(대변자)로 번역 하였고, 개혁성경은 ‘보혜사’로 공동번역은 ‘협조자’로 옮겼다. 원래 한자 보혜사(保惠師)의 뜻을 풀어보면 ‘은혜로 보호하시는 스승’이란 뜻이다.

성서에서 보혜사는 죄를 문책하는 “검사”에 대비되는 법적 용어다. 또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중재하는 사람, 간청하는 사람, 호소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인데, 이를 ‘중보자’, ‘변호자’, ‘협조자’, ‘훈계자’ 등으로 이름 붙일 수 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예수의 화신 혹은 제2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성령은 바로 우리 곁으로(parav), 불림 받은 이(klhtoz), 즉 우리 곁에 와서 우리를 돕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신 분이다. 그래서 성령은 또 다른 의미로 ‘위로자’, ‘권면자’라고도 말한다. 요한복음(14:15~21)은 예수의 재림을 보혜사라고 하는 성령의 인격체로 대치함으로써 그 재림의 물리적 성격을 완화시킨다. 달리 말해서 보혜사는 재림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미 와 계신 인격적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보혜사를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이다.

보혜사는 또 다른 의미로 예수의 거룩한 기운으로 풀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예수의 성스러운 기운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러한 때에 교회는 예수가 우리 사회 곳곳에, 혹은 우리 각자의 바로 옆에 함께 있으며 그의 위로와 보호 아래에 살아간다는 확신을 갖도록 해주어야 한다. 아니 보다 구체적으로 교회는 풍파에 지친 세상의 위로자, 지지자, 변호자가 되어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살아 계신 현존이 파라클레토스라면, 그 파라클레토스가 지금 우리 곁에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몫이라는 말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은총으로 주어진 것, 그 성령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세계에 보혜사를 보내 주셔서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돕게 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보혜사는 협조자, 돕는 자, 훈계자이다.

지금 세계는 위로자이자 훈계자를 원한다. 험한 세상이지만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위안이 필요하며, 동시에 이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 이들에게는 참다운 훈계자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위안의 비결은 인간의 지혜나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은총에서 기원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세계를 지탱할 중심을 찾아야 한다. 그 중심을 가능하게 만드는 능력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는 선물인 파라클레토스라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는 그 파라클레토스를 하나님으로부터 사사(師事)했다. 예수는 이 힘든 세상에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파라클레토스를 주고 가셨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스승처럼, 세상을 향해 어떤 위로, 어떤 권면, 어떤 변호를 해줄 것인가. 여기에 바로 우리 예수 믿는 자들의 깊은 고뇌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