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당당함으로 뻔뻔함에 맞서다!
(행 4:5~12)
뻔뻔함이 당당함을 이기는 세상입니다. 잘못이 있어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되레 큰 소리 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고 있습니다. 후안무치(厚顔無恥)와 안하무인(眼下無人)의 종교성을 자랑하는 세대입니다. 당당함이 도리어 뻔뻔함으로부터 공박(公拍) 당하고, 생명의 가치가 삶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40여 년 동안 앉은뱅이로 살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가 일어나 걷기 시작했습니다. 꿈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일로 예루살렘이 소란스러워졌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되어 끌려갔습니다. 종교·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분야의 최고 권력자들도 이 사건을 심리하기 위해 모여 들었습니다. 날아가는 새도 능히 떨어뜨릴 기세입니다. 그 중에는 뻔뻔함의 대명사로 불릴만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들 앞에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려진 베드로가 섰습니다. 뻔뻔함의 기세에 위축되거나 주눅들만도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베드로의 모습이 아주 당당합니다. 베드로가 모인 자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당신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살인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고, 바로 그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은 것이다. 오직 예수 이름 외에는 구원이 없다." 뻔뻔함을 당혹스럽게 하는 당당함입니다.
이런 당당함의 이유가 무엇일까요? 참된 권세가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는지 알았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언제나 그 중심이었습니다. 이것이 그 당당함의 이유 전부였습니다.
사도들이 처음부터 이런 당당함에 서 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뻔뻔함으로 예수님께 자신의 뜻을 들이대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고 따르면서도, 주님의 뜻을 온전히 받들기보다는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예수님을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때마다 그런 일들은 부질없음과 속절없음으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을 잘 아는 것 같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전적으로 주님의 뜻을 받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자 앞에서도 그런 태도에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완전히 딴판이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를 주도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제자들의 이전 모습을 기억하시지요? 그 중에는 제 한 목숨 살겠다고 ‘겉옷까지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도망쳤던' 자도 있습니다. 심지어 스승을 저주하며 부인했던 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 거는 자가 되었습니다. 한 두 사람 정도라면 ‘정신이 이상해져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겠지만, 모든 제자들이 그렇게 미쳐버렸습니다. 이 현상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생방송으로 목격했다는 것 외에는….
예수님은 길(道)이십니다. 그 길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확신이 있었기에, 사도들은 시대의 뻔뻔함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과 온전한 공감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뻔뻔함은 길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길이 아닌 것을 길이라고 우기게 합니다. 그래서 뻔뻔함은 세상을 망가뜨리는 시한폭탄입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질수록 풍성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과 뜻에 반응하는 공감의 능력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생명을 실어 나르는 당당함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뻔뻔함과 당당함의 차이가 있습니다. 뻔뻔함은 자기중심의 판단과 정죄의 마음을 더욱 깊게 하지만, 당당함은 생명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살찌게 합니다. 시대의 뻔뻔함에 굴하지 않는 사도들의 당당함이 있기에, 예수의 생명은 여전히 강물 되어 흐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