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5호> 주후 304년 4월 29일 시실리의...

2011-03-16     한국성결신문

▨… 주후 304년 4월 29일 시실리의 카타나에서는 기독교인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무슨 죄를 지었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재판이 아니라 사형언도를 위한 요식행위였다. 사형선고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조용히 찬송을 불렀다. 그때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죽기를 원합니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법정문 밖에서 들렸다. 유플루스였다. 재판관 카비시아누스는 가차없이 그에게도 사형을 선고하였다.

▨… 법정 관리도, 감옥의 간수들도 속으로 머리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역시 다르다.” 초대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도 지적하였지만, 원시 그리스도 교단이 그 세력의 판도를 넓히는 데는 능변의 설교가나 치유의 기적을 앞세운 어떤 사람들이 역할을 감당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역시 다르다는 평가를 이끌어낸 사람들이 로마제국을 흔들었고 마침내는 공인받게 만들었다.

▨… “일본인은 역시 다르다.” 쓰나미로 폐허가 되어버린 일본에서 빵 몇 개, 물 한병을 사기 위해 줄서는 일본인들을 보면서 한국 TV의 리포터가 쏟아낸 감탄사이다. 파이낸셜타임즈의 어느 칼럼니스트는 “인류가 더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일본이 보여줬다. 일본의 시민의식은 인류의 정신이 진화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고 썼다. 쓰나미는 일본인들을 삼켰지만 그 문화의 저력은 삼키지 못한 것이다.

▨… “이번 쓰나미를 계기로 이런 것(다신숭배)에서부터 돌이키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경고는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한국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목회 성공의 모델로 삼고 있는 어느 목사가 일본 쓰나미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이 말이 그리스도인은 역시 다르다는 평가를 얻게 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궁금하지만, 이 말에 대해 청와대가 이러쿵저러쿵 하고 있음에 대해선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 지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에 담아야 할 것은 일본의 쓰나미가 하나님의 경고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역시 다르다는 평가를 얻을 수 있도록 재난을 당한 이웃을 돌보는 손길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율법을 잘 지켰거나 성경을 잘 알아서 주님의 칭찬을 받은 것이 아니다. 로마라는 가장 발전된 문화를 뒤흔든 힘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었음을 되새길 때만 기독교의 격은 살아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