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어 원어로 푸는 세상이야기<11>
양심에는 터럭도 없어야 “ suneivdhsis(쉬네이데시스) ”
지금 교회와 사회는 인간의 최후 보루인 양심마저도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목회자가 횡령과 도박, 폭행, 간음 등으로 분란을 일으키고, 교육계는 제자를 가르칠 때 강도 높은 체벌을 가하고도 도제식 관행이라며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하나 같이 자신들이 잘못 한 것이 아니라 마녀사냥을 당한 것이라고 강변한다.
인간의 양심은 고대 철학이나 초대 교회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양심(suneivdhsis)이라는 단어는 syn(함께)과 eidon(보다) 혹은 oida(안다)라는 뜻의 합성어이다. 즉 양심은 타자와 내가 공통의 사실을 인식한다(co-knowledge)는 의미다. 이것은 영어로도 con+science인데 번역이 매우 잘된 것 같다. 이 양심은 자신을 자각하는 데서 출발해서 선악을 인식하는 기능이자 정서이기도 하다. 이 개념은 신약성경에 총 30번 나타나며, 바울서신에 주로 사용되어 20번 등장한다.
도덕적 양심은 기원전 1세기경 헬라사상에서 자주 사용되던 용어로서, 사람이 자신의 “잘못한 행동에 대해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상태에 직면했을 때 발동되는 감정이다. 바울은 이 단어를 그리스-로마 문헌의 의미에서와 같이 악한 충동과 선한 충동간의 투쟁, 즉 잘못한 행동을 저질렀을 때에 오는 도덕적 충동과 자아 충돌의 의미로 차용했다. 따라서 걸출한 신약학자 케제만(E. Kasemann)이, “인간은 자신의 가장 깊은 존재 속에서는 자기 자신이 주인이 아니다”라고 말했듯이, 복음을 듣는 헬라인에게는 양심이라는 개념어가 무척 익숙하게 들렸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고대 그리스 비극시인인 에우리피데스(Euripides)때부터 양심에 어긋났을 때 마음에서 일어나는 고도의 자기 반성적 언어를 잘 알고 있었다. 양심의 가책 혹은 꺼림칙함은 타인의 면전에서의 수치나 불쾌감을 낳고, 범죄나 죄에 빠지기 쉬운 쾌락은 불쾌한 감정을 낳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2장 15절에서 ‘양심’이라는 단어를 설명했을 때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쉽게 이해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모름지기 모든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어서 그 또한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개인의 은밀한 내면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양심은 깨끗한 삶이나 잘못한 행동을 했을 때의 불쾌감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양심은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추호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야 하고 마음이 깨끗해야 할 영역이 그 무엇보다도 종교계와 교육계이다. 내 안에 들어서 있는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타자 혹은 절대타자가 나의 마음의 상태를 알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우리의 언어와 행위가 한 순간이라도 흐트러질 수가 없을 것이다.
헬라어에서 ‘안다’라는 동사 ‘oida’(오이다)는 ‘본다’라는 동사 ‘eidon’(에이돈)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본다는 것과 안다는 것은 동근원적 의미다. 그래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말할 때 오이디푸스는 oida(안다)와 pous(발)가 합성어가 되어서 불완전한 인간, 불구적인 존재를 일컫기도 한다.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던진 수수께끼는 ‘발’의 정체다. 곧 인간이란 땅 위를 걷는 존재라는 말인데 이는 다름 아닌 인간의 한계성과 유한성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oida라고 하는 헬라어가 인간의 내면적, 주관적 지각을 일컫는 것이라면, 우리 안에 그 지각을 가능하게 하고 함께 우리 자신을 인식하도록 만드는 초월적 존재, 혹은 불멸의 이념적 시선(바라봄)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불구의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칼 야스퍼스(K. Jaspers)는 “교회와 마찬가지로 대학은 초자연적이고 전세계적인 성격을 지닌 불멸의 이념으로부터 그 자율성을 부여받는다… 학원의 자유란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의무를 수반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 한국교회와 한국대학의 갈 길은 어진 마음(良心)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이참에 예수의 영성을 통해서 양떼를 돌보고 가르치는 목사와 지성의 요람이라는 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수는 모두가 양심의 스승이 되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