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을 헐뜯는 것은 살인보다 더 위험하다. 살인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지만 헐뜯기는 반드시 세 사람을 죽인다. 헐뜯는 사람 자신, 그 말을 비판 없이 그냥 듣고 있던 사람, 그리고 헐뜯기의 대상자가 된 주인공이다.” “남을 헐뜯는 자가 저지르는 죄는 무기로 사람을 해치는 것보다 더 무섭다. 무기는 상대가 가까운 데 있어야만 해칠 수가 있지만, 헐뜯기는 먼 곳에서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 탈무드의 경구를 누군들 모를까. 그러나 책임의식 없이 마구 갈겨쓴 ‘악플’같은 헐뜯기 때문에 총회장이 비틀대고, 교단 지도부가 흔들거리고, 목사와 장로들이 머리를 흔든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우리 성결교단이 구호도 거창한 “교단 바로 세우기”를 핏대를 세워가며 고함질러야 할 만큼 진흙탕 속에 널부러져 있는가. 십자가의 정신이나 성결함이 흔적조차 없을 만큼 사라졌다는 것인가?

▨… 헐뜯기와 비판은 다르다. 삼척동자라고 하더라도 구분할 수 있다. 아무리 능수능란한 화장술로 감춘다고 하더라도 헐뜯기는 심한 악취를 풍기는 가죽 공장 같아서(탈무드) 스스로 본색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라는 전체주의를 민족사회주의라고 명명함으로서 잠시 동안 독일 국민을 속일 수 있었지만, 영원히 속일 수는 없었다. 아마 헐뜯기도 잠시는 속일 수 있을 것이다.

▨… 비판이 헐뜯기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그(혹은 그것)를 위한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의 비판이 나의 이익을 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나의 불이익까지도 감수할 결의가 되어 있어야 건전한 비판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교단을 또는 그 무엇인가를 비판하려는 사람들은 교단을 또는 그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자신의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소인배들은 쉽게 흉내내지 못할 일이다.

▨… ‘신문윤리강령’은 사실의 전모를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보도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또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고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을 것도 다짐하고 있다. 언론이 사회의 공기로서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음도 천명하고 있다. 신문을 헐뜯기에 이용하려는 세력도 경계해야겠지만 신문에 글을 쓰는 이라면 ‘신문윤리강령’을 한번쯤은 읽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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