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예배로 움직이는 교회

1994년에 상영된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는 3년 반에 걸쳐서 미국 대륙을 달리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는 계속 달린다. 멈추라고 해도 달린다. 달리지 못하게 하여도 달린다. 제자리에서도 달린다.

우리사회는 코로나19로 제동이 걸렸다. 뉴스에서는 “전 세계가 마이너스 ‘성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성장’이라는 말을 해야 사람들이 듣는가보다. 멈추어 있는데도 제자리에서라도 달리고 싶은가보다.

코로나19는 우리가 과소평가하거나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에 의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 작은 바이러스가 그 동안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하였던 것들을 돌아보게 했다.

‘성장’이라는 띠를 머리에 단단히 묶고 앞만 바라보고 달리다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코로나19로 인해서 알아차리게 되었다. 무엇일까? ‘교회도 달리고만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세상만 아니라 교회도 ‘성장’이라는 띠를 머리에 묶고 달리고만 있었다. 코로나19로 제동이 걸렸는데도 제자리에서조차 달리고 있었다.

달리면 생각할 여유가 없다. 달리다보면 자신과 주위를 돌아볼 틈이 없다. 코로나19가 제동을 걸때 교회의 정체성을 살펴보자.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은 집에 가족이 함께 모여서 돈독해지고 좋다고 한다. 평일에도 가족이 함께 할 시간이 없는데 교회가면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서 예배를 드리니까 가족이 함께 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 교회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학교는 사람을 사회에 적응할 수 있게 준비시키는 곳이다. 학교는 ‘사회성’을 배우는 곳이다.

반면에 교회는 사람을 하나님 나라에 적응할 수 있게 준비시키는 곳이다. 학교는 당연히 사람을 세상에 적응시키는 곳이기에 세상과 연관이 있어야 한다. 반면에 교회는 세상보다는 하나님 나라와 더 연관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였듯이 하나님 나라는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나무와 같다.(눅 13:19)

나무는 새들이 맹수를 피할 수 있는 곳이다. 나무는 새들이 뜨거운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이다. 나무는 새들이 추위를 피해 둥지를 지어도 텃새부리지 않는 곳이다. 교회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샘플이어야 한다.

이사야 11장에서 예언한 하나님 나라는 암소와 곰이 함께 먹고,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굴에서 장난치고,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어린 아기에게 끌리는 곳이다. 권력자가 약한 자에게 끌리는 곳이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함께 식탁에서 먹고,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함께 눕는 세상이다.

외국인노동자와 한국인이 함께 머물고, 농인과 청인이 서로를 경청하고, 성폭력피해아동이 보호를 받고, 노숙자가 함께 예배 드리고, 트라우마 생존자와 함께 계속 이야기하고 애통하는 곳이어야 한다. 여기가 하나님 나라이고 교회가 사람들을 적응하게 준비시켜야 하는 곳이다.

예배는 설교를 듣고 찬양을 듣는 예배로 멈추면 안 된다. 설교를 듣고 찬양을 듣는 ‘감동받는 예배’로 멈추면 안 된다. 온라인예배는 ‘감동받는 예배’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성도가 감동받는 청중으로 수동적인 자세를 취한다.

예배는 모두가 참여하고 서로를 돌보는 ‘행동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모든 성도가 움직이며 서로를 돌보며 행동하는 예배가 하나님께 응답으로 ‘행동하는 예배’다. 그늘진 곳을 돌아보고, 앉아있는 자를 찾아가고, 약한 자를 위해 대신 목소리를 내고, 우는 자와 함께 애통하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춤을 추는 예배, 이것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행동하는 예배’이다.

‘성장’이라는 머리띠를 벗고 달리기를 멈추고 하나님나라를 먼저 바라보면 좋겠다. 코로나19가 언제 사라질지 모르지만, 교회는 계속해서 하나님나라에 적응시키는 곳으로 머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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