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도 불사한 신앙, 순교의 꽃으로 피어나
전쟁 속에 꽃피운 성결인의 순교 신앙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이 발발한지 올해로 70년이 됐다. 6.25전쟁은 나라를 폐허로 만들고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 중에는 총칼 앞에서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기꺼이 내놓고 순교의 피를 흘린 수많은 성결인들이 있다. 섬 선교의 어머니인 문준경 전도사는 모래사장에서 학살당하였고, 건축 중인 교회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임광호 전도사(하리교회), 이판일 장로(임자진리교회), 윤임례 집사(두암교회) 등이 성결교회를 빛낸 순교자들이다.

무엇보다 성결교회 순교의 특징은 집단순교 사건이다.

충남 논산 병촌교회에서는 66명의 성도가 한꺼번에 무참히 살해되었고, 임자진리교회에서도 이판일 장로 등 48명의 성도가 한 날 한 시에 순교했다. 정읍 두암교회에서도 윤임례 집사 등 23명이 주님을 위해 목숨을 잃었다. 이런 순교신앙으로 교회는 더 든든히 세워질 수 있었다. 그들의 결단과 순교의 신앙을 우리 것으로 삼기 위해 순교지 순례길을 걸어보자. 충남 강경에서 전남 신안까지 ‘성결교회 순교성지’가 이어져 있다.

신앙을 지키다 66인이 순교한 병촌교회
 

6.25전쟁 당시 가장 많은 순교자가 나온 병촌교회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66명의 성도들이 순교를 당했다.

1950년 9월 27일과 28일 ‘예수를 믿으면 다 죽여버린다’는 공산군의 위협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교회 직원, 세례인, 학습인, 구도자, 학생과 유아까지 66명에 이르는 성도들이 공산군에게 구타당하며 고통 받다 구덩이에 그대로 묻혔다.

전체 성도 74명 중 무려 66명이 희생된 사건이었다. 시신 수습 때 당시 만삭이던 정수일 집사(당시 31세)는 10살 아들을 품에 안은채 죽음을 맞이했다. 당시 공산군의 학살에서 겨우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순교 사건을 생생히 증언하여 병촌교회의 순교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병촌교회 앞마당에는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66인을 기리는 순교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순교자들의 이름을 새겨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있다. 순교자 66인을 기리는 순교기념관과 카페도 있고, 안으로 들어서면 병촌교회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관도 있다.

 

예배당에 포탄이 떨어진 ‘강경교회’
병촌교회에서 차로 10분 정도 가면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옛 강경성결교회 예배당이 나온다. 이곳은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진원지로, 김복희 전도사와 57명의 아이들이 신사참배에 불참하다 순교했다. 교회 옆에는 신사참배거부운동 기념비가 세워졌다.
인근에 있는 강경교회 옛 예배당은 6.25전쟁 당시 폭격당한 일화를 품고 있다. 한국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옛날 한옥 예배당인 강경교회는 일제 때에도 예배를 멈추지 않았던 곳이다. 담임이었던 이헌영 목사는 6.25때도 피난을 가지 않고 주일예배를 사수하며 교회를 지켰는데, 어느 날 폭탄이 천장을 뚫고 교회 정중앙에 떨어졌다. 감사하게도 폭탄은 마룻바닥에 있던 쌀에 안착하여 불발됐고, 이 사건이 널리 알려져 왔다. 그 때의 일화들이 교회 바로 앞 담벼락에 그림으로 그려져 이해를 돕는다.

윤임례 집사 등 23명이 순교한 두암교회
                                                                                                     

  

전북 지역의 대표적인 기독교 유적지 중 하나인 정읍 두암교회는 올해로 순교 70주년을 맞았다.

두암교회는 일제에서 해방이 되면서 성도들이 세운 교회였으나 6.25전쟁 중 쳐들어온 공산군에 의해 23명이 순교 당했다.

 1950년 10월 19일 당시 담임이던 김용은 전도사의 어머니 윤임례 집사와 둘째 아들 김용채 집사, 며느리 조선환 집사 등 일가족이 공산군에게 학살됐다.

이날 공산군은 김용은 전도사의 어머니인 윤임례 집사의 집에 몰려와 윤 집사를 칼로 죽인 뒤 가족들을 방에 몰아놓고 집에 불을 질렀다. 이후 김용술 씨와 그의 가족, 김용은 전도사의 친구 박호준 씨 등 4가정 23명의 성도들이 죽임을 당했다.

시신을 수습한 서명선 목사와 김용례 사모(윤 집사의 막내딸)는 “무릎을 굽힌 채 머리 뒤쪽에 칼자국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죽음에 앞서 기도하다가 순교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두암교회에 방문하면 아들 김용은 목사와 신앙을 지켜낸 윤임례 집사의 이야기가 담긴 영상물을 볼 수 있다.

두암교회 순교지는 1990년대에 순교자들의 무덤을 모아 ‘순교자의 묘’로 합장했고, 교단에서 십자가를 진 채 대지를 딛고 굳게 일어선 신앙의 거인 23명을 상징하는 순교자 기념비를 새로 세웠다.

젊은 임광호 전도사가 순교한 하리교회

 

하리교회에는 2005년에 이르러서야 순교기념비가 세워져 순교 당시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임광호 전도사는 1950년 초 개척된 하리교회의 첫 목회자로 교회부흥에 헌신하다가 6.25때 인민군에게 끌려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당시 하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백한나 집사 등의 증언에 따르면 공산당은 교회건축의 중단과 신앙의 포기를 강요했고 임 전도사는 이들에게 “예수를 믿어야 산다”고 전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임 전도사를 포함해 몇 사람을 끌고 나갔고 이 때 어디선가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 여겨지고 있다.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지 ‘증도’.

신안군 증도는 섬 선교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지다.

일년에 아홉켤레 고무신을 갈아 신어가며 복음을 전했던 그녀의 숭고한 신앙의 역사는 증도에 건립된 문준경전도사 순교기념관에서 한 눈에 볼 수 있다. 문 전도사가 목숨을 빼앗긴 바닷가 순교지에는 묘지와 사적비 등이 설치된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문 전도사는 일제 말기 신사참배 거부와 위안부 징집 반대운동으로 인해 옥고를 치르고 증동리교회도 빼앗겨 목포로 쫒겨났다. 그러다 해방 후 6.25전쟁이 발발해 교회 성도들이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문 전도사는 목숨을 걸고 증동리교회 신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다시 신안군 증도로 돌아간다.

문 전도사를 기다리는 건 고문과 죽음이었다. 그는 새끼줄에 묶여 끌려가 발로 채이고 죽창에 찔리고 총대로 후려침을 당했다. 문 전도사는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라는 죄명으로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성도들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다 1950년 10월 5일 모래사장에서 인민군들에게 총살을 당한다.

이때 문 전도사가 순교당한 모래사장의 모래로 만든 벽돌로 신축한 증동리교회에도 문 전도사의 순교기념비가 우뚝 서있다. 문 전도사가 개척한 교회는 신안 일대에 100여 곳인데 그 중 증도에 증동리교회 외에도 대초리교회 방축리교회 화도교회 등 11개 교회가 모여 있다.

이판일 장로의 순교지인 임자진리교회

임자진리교회는 순교지 가운데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곳이지만 꼭 가볼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도에 위치한 진리교회는 48명이 순교했다. 1950년 10월 5일, 이판일 장로와 이판성 집사 가족을 비롯해 성도 48명이 비밀예배를 드리던 중 급습한 공산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공산군은 “예수 믿지 않겠다고 손들고 나오면 살려 주겠다”고 했지만 손들고 나오는 교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총과 칼, 몽둥이와 죽창을 든 공산주의자들은 성도들을 포승줄로 포박한 뒤 형장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3km나 되는 험난한 새벽길을 더듬으며 처형장 백산에 당도했다. 그러자 미리 파놓은 큰 구덩이로 밀어 넣고 노인과 어린이까지 모두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후 1950년 10월 30일, 국군의 수복으로 고향에 돌아온 이판일 장로의 장남 이인재가 원수들을 모조리 잡아 야산공터 처형장에 세우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아버지의 “용서하라”는 음성을 듣고 공산군들을 용서하고 풀어줬다. 이판일 장로가 지킨 신앙은 이인재 목사를 비롯해 이성관, 이성균 목사로 이어지는 목회자 가정을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하며 올해는 잊혀져 가는 순교성지를 돌아보며 순교신앙을 되새겨 볼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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