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에 목마른 이민교회 청지기
경매 위기 교회당 지키는데 앞장
사과 판 수익금 교단 재정에 기여
선교에 우선…비지니스 선교 꿈꿔

척박한 이민생활 속에서도 자신보다는 교회를 먼저 생각하고, 선교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결인이 있다. 바로 오레곤선교교회 이광천 장로와 이경순 권사 부부(오레곤선교교회·사진)가 그 주인공이다.

미국 오레곤주 포틀랜드 캐논 비치에서 마켓을 운영하는 이 장로는 매년 사과 1,500 상자와  김 판매를 통해 얻어진 수익금으로 북한의 고아원을 돕고 파라과이 빈민촌에 교회를 세우는 일을 후원했다.

미주성결교회 부총회장을 지낸 이 장로는 미주 총회의 부족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사과를 판매한 일이 있다. 오레곤주 포틀랜드에서 사과를 실은 차량을 LA까지 며칠씩 걸려도 직접 몰고 와서 그 사과를 다 팔고서야 돌아갔다. 당시 사과판매 수익금 2만 달러는 미주 총회 재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는 오레곤선교교회가 건축 빚을 갚지 못할 때도 은행에 발이 닳도록 찾아가 자신이 보증을 서서 재융자를 받기도 했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김 수입의 타당성을 살피기 위해 충남 대천을 찾았다. 김 판매를 통한 선교비 마련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선교 재정을 모을 수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지 사고 팔 궁리부터 한다. 

지금은 모든게 신앙중심이지만 이 장로가 처음부터 신실한 신앙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1984년 1월 17일 비스니스를 위해 미국 오레곤주 포틀랜드에 첫 발을 디뎠다. 당시 동생과 함께 가 공항에 나왔는데 이보현 목사는 그의 손을 잡고 축복기도를 했다. 당시 불신자였던 그는 얼떨결에 기도를 했지만 믿음이 전혀 없을 때였다. 이후에도 동생 가족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주일이면 교회로 끌러갔다.

당시 이민자 중에는 이 장로처럼 심심풀이로 교회를 다니는 ‘무늬만 신자’가 많았다. 그렇게 이민생활이 2년 정도 지났을 때, 이보현 목사가 갑자기 그에게 신학공부를 권했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체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타코마에 있는 루터란신학교에 입학했다.

첫 날 출석해보니 대부분 장로나 전도사였다. 심심풀이로 교회에 다니며 신학교까지 다니는 학생은 그가 유일했다. 성경을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그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도 구분하지 못했고, 내용도 비슷한 것 같아서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저 “하나님을 이용해서 생활해보자”는 마음이었지만 강의를 들을수록 서서히 바뀌어 갔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느껴졌다. 그 말씀이 너무 오묘하고 신비롭게 다가왔다. 정말로 학교에 가는 토요일이 기다려졌다. 그렇게 신학교에서 변화 받은 그는 이후 성령을 체험했으며, 신학교 졸업 후 미국에 온지 9년 만에 장로가 되었다. 그리고 대학원도 진학했고, 한 때 전도사로 사역하기도 했다.

이 장로보다 뒤늦게 미국에 건너온 부인 이경순 권사는 일주일에 두 번 절에 갈 정도로 충실한 불교신자였지만 이 장로의 영향으로 지금은 남편보다 더 적극적인 신앙의 소유자가 됐다. 교회와 선교에 관한 일이라면 호흡이 척척 맞는 이 장로 부부는 “미국에서 가장 잘 한 것을 한 가지 꼽으라면 그것은 하나님 믿은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 장로 아들도 선교사가 되기 위해 무디 신학교에 들어갔고, 지금은 중국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믿는 자는 오로지 변치 않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 장로 부부는 캐논비치에서 75마일을 자동차로 1시간 30분 씩 달려 오레곤선교교회에 나온다. 수요일, 금요철야예배, 주일예배를 모두 섬기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선교에 앞장서고 있다. 파라과이, 중국 선교사를 후원하고 있으며, 선교사나 목회자들에게 선교비도 주고, 식사 숙박 등으로 정성껏 섬기고 있다.

하지만 이 장로 부부는 아직도 선교에 목마르다. 부부는 남은 인생을 선교하며 살고 싶다고 밝혔다. 이들 부부는 “비즈니스 선교를 계획하고 있다”며 “후방 선교사들을 지원하고, 선교지를 다니면서 현장 선교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