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기념 좌담회

1919년 3.1운동은 근대 민주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주도해 자주독립과 평화의 의지를 전 세계에 드러낸 역사적 사건이었다. 특히 3.1운동 정신은 앞으로 대한민국이 화해와 평화로 나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유산이다.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더 의미있게 맞이하기 위해 교회사를 전공한 교단 신학자들과 함께 성결교회와 3.1운동의   관계를 알아보고, 앞으로 교단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모색했다.

* 진행 : 정병식 박사
*좌담 : 박명수 주승민 박문수 황훈식 김성호 박사
*장소 :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실
*일시 : 2019년 2월 15일  

3.1운동은 기독교 주도의 평화운동

정병식 박사(서울신대 교회사) 3.1운동은 손꼽히는 민족운동 가운데 하나로 일각에서는 근대적 민족으로 거듭난 중생의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한다. 당시 기독교는 어떤 역할을 했나.

박명수 박사(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한국 기독교는 1919년 3·1운동 당시 주역으로 활동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33인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고, 3·1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기독교조직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물론 타 종교의 역할도 있었지만 실제적으로 3.1운동을 준비하고 주도한 것은 기독교였다. 특히 전국 곳곳에 세워져 있었던 교회는 지역 독립운동의 거점역할을 감당했고 3·1운동 후 조직된 임시정부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주요 역할을 감당했다.

주승민 박사(서울신대 교회사) 기독교의 비폭력적 저항이 3.1운동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특히 기미독립선언서에는 동북아의 평화와 공존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만이 아닌 주변 국가들의 평화를 함께 주장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3.1운동은 기독교가 주도한 비 폭력 시위이자 평화와 공존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박문수 박사(서울신대 강사) 3.1운동과 기독교의 정신은 일치한다. 억압하고 남의 것을 빼앗는 것에 기독교가 항거한다는 의미인데 방법론으로는 폭력이 아닌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입장이다. 비폭력 저항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3.1운동의 방법이었다.

김성호 박사(서울신대 강사) 3.1운동은 평화적 저항운동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10절에 근거한 평화적 저항운동이 3.1운동인 것이다.

성결교회 전국서 3.1운동 이끌어

정병식 성결교회 교인들은 어떻게 3.1운동에 참여 했나.

황훈식 박사(서울신대 강사) 당시 성결교회는 복음전도관 시대로 교단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3.1운동 당시에는 성결교가 복음전도관 시대였기 때문에 장로교와 감리교와 비교하면 교세가 작았다. 그럼에도 개인별로 만세운동에 동참했으며 영향력을 끼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명수 타 교단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전국에서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경상남도 밀양을 중심으로 김상준과 강시형이 만세운동을 이끌었으며 경북 영덕에서는 김응조 목사, 강원도 철원의 곽진근 전도사 등이 지역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 또 백신영은 3.1운동 직후에 대한애국부인 행동대장으로 활동했고 이성봉 목사도 대동청년단에 가입해서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사실상 전국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이명직 목사도 자서전에서 3.1운동에 참여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정병식 신학교와 교단 차원에서의 동참은 어떠했나?

박명수 서울시내에 위치한 경성성서학원의 학생이 3.1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그로 인해 학교는 휴교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학생들 가운데는 적극적인 가담으로 인해 체포되어 구금된 사람들도 있었다. 김응조 목사가 당시 대학생들의 모임에 학교를 대표해 참여했다. 서울에서 독립선언문을 나눠주면 고향으로 내려가서 그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했는데 김응조 목사는 정동제일교회에서 만세운동을 한 후 고향에서 연행되었다.

김성호 일제치하의 성결교회는 3.1운동 등 사회적 외침에 대해 외면하거나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고 신앙고백문제에 대해 저항해야 했던 순간에는 대부분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평소에는 말씀과 복음전도 등 순수하게 목회에만 집중하다가도 저항이 필요한 곳에는 ‘비폭력 저항’을 보여준 것이다. 실제로 1924년 신사참배를 최초로 거부했던 강경교회의 김복희와 교회학교 57명의 저항의 사건은 한국성결교회의 ‘비폭력 저항’의 ‘표상’을 잘 보여주는 예가 된다.

박문수 당시 젊은이들과 여성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3.1운동에 참여한 한국인들이 대개 젊은이와 여성이 많았다는 점과 일치한다. 참여한 젊은이와 여성들이 기독교 교육의 혜택을 입은 이들이었고, 그만큼 정의에 대한 결단에 앞장설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모순과 질곡이 있는 일제의 무단정치라는 현실에 굴복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향한 기대와 소망을 직접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이들이었다.

재림신앙으로 교단 해산 아픔 겪어

정병식 특히 성결교회는 3.1운동 말고도 재림신앙으로 일제의 핍박을 받고 교단 해산까지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박문수 일제 강점기시대 성결교회는 재림론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다른 교단보다 더 많은 박해를 받았다. 성결교회의 종말론은 전 천년설을 주장한다. 전 천년설의 핵심주제는 그리스도의 재림인데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휴거를 통해 구원하고 재림하신 그리스도가 지상에 내려가서 성도들과 함께 세상을 통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지상에서 천년 왕국을 의의 통치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전 천년설이 그들이 갖고 있는 국가의 이념에 위배된다고 생각해서 성결교회를 핍박하고 교단까지 해산했다.

주승민 당시 종말론을 주장했던 종교들은 더 핍박을 받았다. 1943년 우리교단의 해산은 다른 교단으로까지 공포심이 미쳤다. 성결교회를 해산시킴으로 다른 교단도 똑같이 될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특히 우리교단의 재림과 종말론 신앙은 다른 교단에 비해 더 많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김성호 성결교단의 강제해산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섣불리 책망하는 것은 한국성결교회의 역사를 대하는 올바른 접근은 아니라고 본다. 일제의 탄압에 따라 교단이 강제로 해산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올곧은 신앙을 고수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교리가 이어지고 있고 우리 교단이 재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박명수 당시 성결교회의 지도자였던 존 토마스 선교사의 집에도 일본인 장교가 거의 매일 직접 찾아와 탐문하고, 경고와 압력을 가했다. 토마스 목사를 방문한 총독부의 장교는 일제의 정책에 반대되는 어떠한 자료라도 찾으려고 샅샅이 뒤졌으며, 신앙교육과 민족교육에 대한 견제와 압박은 성결교회가 감당해야 할 현실이었다.

선교사들도 독립운동 적극 지원해

정병식 3.1운동 당시 선교사들의 역할에 대한 의견들이 다양하다.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지원했다는 의견과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내세우며 관여하지 않았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황훈식 당시 주한 외국인 선교사들은 파송 교단과 신학적 성향을 이유로 정교분리의 원칙을 실천하고 있었다. 때문에 선교사들이 3.1운동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선교사들은 3.1운동을 민족 혁명으로 인식하고 해외에 3.1운동을 알리는 일에 적극 나섰다. 또한 해외선교사들은 일제당국과 가진 비밀회담에서 그들의 정책과 핍박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조선총독부에게 항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인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보듬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동양선교회도 외부적으로는 정교분리원

칙을 지키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적으로는 미국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실제로 최근에는 1919년 3월 켄터키주 윌모어의 애즈버리대 교수와 학생, 이 지역 목회자 128명이 한국을 도와달라며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연명 청원서를 보냈다는 내용의 신한민보 기사가 발견됐다.
 
박명수 선교사들은 정교분리를 이유로 독립운동에는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지만 평신도들의 활동은 자유롭게 허락했다. 때문에 이승만과 안창호 등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된 것이. 앞에서 드러나는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뒤에서는 일제에게 항의하고 3.1운동을 널리 알린 촉발제가 된 것이다. 또 1919년 3월에 일어난 영국선교사 토마스 구타 사건은 일본의 만행이 국제적으로 드러난 중요한 사건이다.

정병식 선교사들이 3.1운동을 적극적으로 알림으로 해외에서 조선에 대해 다시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에서는 맨손 혁명으로 알려지며 주목을 받았고 일본의 한국 통치에 대한 전략도 수정된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외신에서 3.1운동을 적극 다루면서 일본의 무자비한 억압과 탄압이 전 세계로 알려지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3.1운동을 통해 우리의 모습 돌아봐야

정병식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박명수 교단만 생각하지 말고 교계, 나아가서는 한국사회를 품을 수 있는 기독교가 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100년 전 기독교는 그들만의 집단이 아닌 조선인들의 아픔을 품고 자주 독립을 함께 외쳤다. 불과 1.5% 밖에 되지 않았던 소수였지만 사회를 이끌어가는 집단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기독교인의 수는 많이 늘었지만 영향력은 그때보다 못하다. 3.1운동 100주년을 계기로 한국교회의 갱신을 바란다.

주승민 역사의식을 바로 잡아야 한다. 민주평등박애정신과 무저항적 저항정신으로 시작된 3.1운동이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할 때 어떤 영향력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기독교가 3.1운동과 정부수립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한 교계와 학술계의 노력이 요청된다. 또 교단의 역사속에서도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준엄하게 회개하고 다시 돌이키는 모습이 필요하다. 
 

정병식 당시 3.1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보다 한국인이기 때문에 참여했을 것이다. 민족의식과 애국의식을 가졌다는 의미다. 선조들이 피 흘리고 고통받으며 얻은 것을 우리는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본다. 비록 3.1운동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지만 그 정신만은 계승하고 지켜나가야 한다. 좁게 보면 기독교에 한정되지만 시각을 넓히면 국가에 대한 것도 포함된다.

박문수 3.1운동은 저항정신으로 말할 수 있다. 우리 성결교회는 일제강점기의 엄혹한 핍박 속에서도 재림론을 버리지 않고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선포했다. 과거의 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닌 오늘과 내일을 위해 3.1운동 정신을 어떻게 담아낼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요구된다. 3.1운동의 역사적인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면 우리 교단에 유익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김성호 3.1운동은 평화적 저항운동이었다. 일제치하에서 억눌리고 핍박받은 조선인들을 위해 기독교인들은 평화를 주장하며 맨 손으로 나섰다. 현재 우리가 저항해야 할 것은 물질만능주의, 반지성주의, 적당주의라고 생각한다. 과거 우리의 신앙선배들이 조선이 독립을 위해 싸웠던 것처럼 이제는 타자의 고통과 고난의 현장을 찾아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황훈식 3.1운동 때 억압을 받았던 조선인들을 위해 나섰던 기독교인들의 희생과 사랑이 지금도 필요하다. 주변에 억압받고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최소한 이에 대해 알리고 돕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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