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강제병합과 한국성결교회의 시작
암울한 시대 성결교회 복음으로 생명 일깨워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교회는 민족의 독립과 자결을 외치며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의 당위성과 의지를 널리 전했다. 본지도 3.1운동과 성결교단의 역사를 돌아보는 기고를 통해 당시 신앙선배들의 발자취를 기억하고자 한다.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의 해이다. 3.1운동은 일본의 제국주의에 맞서 대한의 독립과 민족성을 일깨운 비폭력 만세운동이었다. 또한 3.1운동은 1910년 한국강제 병합 이후 극에 달했던 일본 군국주의의 한민족 말살 의욕을 꺾고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천명한 자주독립 정신의 거보였다. 역사적인 3.1운동 100주년의 해를 맞이하여 3.1정신을 본받아 나라사랑의 마음을 다지고, 독립과 자주정신으로 하나되는 대한민국을 염원하고 있다.

성결교회는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된 일본제국주의의 무력통치 과정 속에서 1907년 태동했다. 암울했던 시대에 싹이 튼 성결교회이기에 나라와 민족의 소중함을 깊이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나기까지 극악한 일제의 만행은 수없이 자행되었다. 특히 1910년 한국강제병합은 이 나라의 주권을 멸절하고 나라 전체를 빼앗겠다는 노골적인 일제의 사기극이었다. 성결교회는 태동한지 3년 만에 새의 둥지와 같은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긴 꼴이 되었다.

1910년 한국강제병합이라는 일제의 국권피탈은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된 한편의 드라마였다. 특히 1900년대 초 10년이 결정적인 시기였다. 1904년 러일전쟁 승리,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칠조약), 1909년 기유각서(己酉覺書) 등을 통해 식민지화의 사전정비작업을 마친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양측의 조인이라는 형식을 거쳐 한국을 강제 병합했다. 그 후 시작된 일제의 식민지 36년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과 항복으로 종식되었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합조약은 강제에 의한 것이며, 국제법적으로 성립이 불가하다는 것이 학계의 지배적 견해이다.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계기로 조약의 불법성을 증명하는 많은 자료들이 지난 2010년 전후로 발굴되었다. 일본의 양심 있는 지식인 그룹도 한국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이제 일본은 조약의 위법성을 인정하고 도덕적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 과거에 대한 올바른 역사 인식은 한일 양국의 미래에 중요한 시금석이다.

강제병합으로 이 땅의 기운이 쇠퇴일로에 있을 때에 복음으로 생명을 일깨우는 운동이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 바로 성결교회의 등장이다. 일제의 강제병합은 이 나라의 명운을 약화시켰으나, 성결교회의 시작은 복음을 심어 생명운동을 일으키고, 궁극적으로 나라를 살려내려는 신앙운동이었다.

성결교회가 등장한 1900년대 초기 한국의 종교적 상황은 일본의 종교정책에 좌우되었다. 일제는 일본적 기독교 확립에 목표를 두고 조선전도론으로 제국교회화에 전력을 기울였다. 통감부 역시 포교규칙을 통해 선교활동을 통제하고, 선교사들을 통제했다.

한국성결교회의 모체인 동양선교회복음전도관은 1907년 5월 30일 염곡에 세워졌다. 1907년은 정미칠조약의 해로 알려져 있다.

고종은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한국의 상황과 일본의 정치적 부당성을 알리려 했지만, 오히려 그 책임을 추궁당해 7월 20일 황위를 순종에게 이양하는 수모를 겪었다. 일본은 보복으로 정미칠조약을 체결하고, 곧 바로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동양선교회복음전도관이 세워지고 난 후 불과 두 달여 동안 이 땅에서 벌어진 상황들이다. 정치적 상황과는 달리 1907년은 ‘대부흥운동’의 해로 여길 정도로 기독교가 사회전반에 확산되어 있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은 1909년 백만인 구령으로 이어지는 변곡점이 되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선교에 대한 실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일본에 있던 동양선교회가 한국에 첫발을 디뎠고, 복음전도관 설립에 이른 것이다. 동양선교회복음전도관은 동양선교회 창시자인 카우만의 지원과 동양선교회 산하 동경성서학원에서 유학했던 정빈과 김상준 두 한국인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5월 30일에 개관했기에 한국성결교회는 이 날을 창립일로 지키고 있다. 1907년에 한국이 처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보면, 한국성결교회의 탄생은 그야말로 가시밭의 백합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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